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32년 12월 19일 재판에서 도산(島山)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았는데, 감형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항소를 포기하여 결국 4년형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33년 3월 28일 도산은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대전형무소(大田刑務所)로 이감(移監)되었는데 함께 이감된 인사들은 구연흠(具然欽), 최익한(崔益翰) 등 임정 창조파(臨政創造派)로 활동한 공산당 계열 인사 등 32명이나 되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500여 명이 수감(收監)되어 있었으며, 공산당 재건 사건 및 노동농민쟁의 사건 관련자와 독립지사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여운형(呂運亨)을 비롯하여 김철수(金綴洙), 안상훈(安相勳) 등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임정(臨政)이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시절에 도산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었다.

도산은 1933년 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1933년 3월 28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초기에 독방 생활을 했다.

독방에서 도산은 규칙적인 생활을 철저하게 하여 건강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도산은 틈틈이 노역 일도 맡아 방에서 종이 노끈을 꼬아 수공품을 만들거나 칠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요구하여 직접 칠공장 노역장에 나가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편 1934년 2월에는 4년 징역형에서 3년으로 감형조치가 있었으며, 마침내 1935년 2월 10일 잔여 형기를 22개월 남기고 가출옥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산이 가출옥할 당시 평양의 흥사단우인 김동원(金東元)을 비롯하여 여운형(呂運亨), 주요한(朱耀翰), 안맥결 등이 마중나왔다.

도산은 가출옥한 이후 전국을 두루 찾아 다녔는데 그때마다 도산을 만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나 일경은 도산이 많은 사람을 접하는 것을 싫어하여 자주 경고하였다.

1935년 9월 5일 도산은 압록강 대안의 안동청년회의(安東靑年會議) 초청만찬회에서 대공주의(大公主義)에 대한 연설을 하였는데 그 내용을 인용한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안 하는가? 나는 최후로 국가제일, 민족지상의 이념에서 내 나라를 부하게 하고 내 민족을 흥하게 함에는 민족자본주의를 주장하며, 최근 사회혁명사상에는 민족평등, 정치평등, 경제평등, 교육평등 등 4대 평등인 대공주의를 적극 주장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