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십니까

도종환(1953~ )

낮에는 조팝나무 하얗게 피는 걸 보다 왔구요.
날 저물면 먼저 죽은 시인의 시 몇 편을 읽었어요.
어떤 꽃은 낮은 데서 높은 곳을 향해 피는데
낮은 데서 낮은 데로 혼자 피다 가는 꽃도 있데요.
그래서 사월이면 저 자신 먼저 깨우고
비산비야 온 천지를 무리지어 깨우더군요.
해마다 봄 사월 저녁 무렵엔 
광활한 우주를 되 걸어와서
몸서리치게 우리 가슴 두드려 깨우는데요
시 삼백에 삿된 것도 많은 우리는
언제 다시 무슨 꽃으로 피어 돌아와
설움 많은 이 세상에 남아 있을런지요.

 

[시평]

사월은 가장 화사한 달이다. 꽃이란 꽃들 모두 다투듯 피어나는 그런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이, 전쟁이 끝나고 황무지가 된 그 속에서도, 꽃들은 어김없이 피어나니 얼마나 잔인한 달인가. 전쟁 통에 죽어 이제는 더 만날 수 없는 그 사람들의 아픈 기억까지도 모두 저 꽃들과 함께 살아나는 계절이 바로 사월이기에, 사월은 그래서 더욱 잔인한 달이 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사월이 되면, 우리의 모든 기억들을 일깨워주듯이 산과 들, 온 세상에서 저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피어나며 저 많은 화사한 꽃들과 함께 우리를 일깨워주는 그 힘, 과연 그 누가 보내주는 것일까. 그러하여 광활한 우주를 되 걸어와서 사월과 함께 몸서리치게 우리 가슴을 두드려 깨우쳐 주는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지금 우리는 이 사월의 한 복판에 서 있다. 세상에 피어나는 온갖 화사한 꽃들과 함께, 저 꽃들과 함께 피어나는 아픈 기억 속에 우리는 서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더욱 화사하게 깨우쳐 주는 그 가운데 서 있다. 삿되고 삿된 것들 많고도 많은 우리, 이 세상의 한 복판에 우리들 모두 그렇게 서 있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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