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채마밭 오후 - 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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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마밭 오후

박만진(1947~ )

호밋자루를 잡고 풀을 매는 할미와
할미의 손을 잡고 풀을 매는 호미가
닮아도 많이 닮았다

초여름 뙤약볕은
내리쬐는데,

호미 할미의 혼잣말과
할미 호미의 혼잣말이
동구 밖에서도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시평]

봄이 왔다. 들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밭을 갈아엎고 또 작물들이 먹고 자랄 거름을 지어다 부려놓고, 봄 들판이 생기를 띠고 있다. 어제까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땅에서는 파릇파릇 수많은 생명들이 돋아나고, 얼었던 흙은 부드러워 밟는 그 촉감이 달라졌다.

작은 채마밭에도 사람들이 어정이며 보인다. 쟁기를 들고 밭을 고르는 손길들이 바쁘다. 새봄에 갓 나온 모종들을 사다가 심으려고, 그 일손이 바쁘다. 부드러워진 흙을 더 부드럽게 부수고, 거름을 치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흙을 고르고 해서 심는 여러 야채들.

이제 햇살이 조금씩 따가워지면서, 작은 채마밭에도 여릿여릿 잡풀들이 돋아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여리고 여린 모습의 풀들이지만, 햇살이 강해지면서 억센 뿌리로 흙을 단단히 부여잡고 푸른 일들을 펼쳐나갈 잡초들. 이내 머잖아 비록 작은 채마밭이라고 해도 여기저기에서 무성하게 자라날 것이다. 그래서 잡초와 채소가 서로 엉겨질 것이다.

연세가 그윽하신 할머니, 당신의 연세만큼이나 됨직한 오래된, 그래서 손마디와 날이 모두 달아버린 호미 한 자루 쥐고는 채마밭 김을 매실 것이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호밋자루를 잡고 풀을 매는 할미와 할미의 손에 잡혀 풀을 매는 호미가 닮아도 많이 닮았다.

오랜 세월 할머니와 함께 한 호미. 봄이 지나 뙤약볕 내리쬐는 한 여름의 시골 풍경 아니겠는가. 밭을 매며 두런두런 혼자 하는 호미 할미의 혼잣말이나, 두런두런 혼자 하는 할미 호미의 혼잣말이나, 따가운 뙤약볕 아래에서 그저 혼자 두런두런 거리는 한 여름 시골 풍경.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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