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역사 이야기] 옷, 신분을 상징하다 (1)
[사진으로 보는 역사 이야기] 옷, 신분을 상징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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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여인(트레머리, 1900): 구한말 조선의 서민 여인을 찍은 사진으로 카메라를 향한 시선이 자연스럽고 당차보이기까지 하다. 자세와 표정에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인의 복장을 보면 저고리는 짧고 품도 작다. 질끈 동여맨 치마 위로 젖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당시 구한말부터 개화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런 복장(가슴이 드러나는)을 한 여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미니저고리는 1700년대에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복장이 유행했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다거나 성적인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복장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여인의 머리를 보면 당시 유행하던 트레머리(얹은머리)를 볼 수 있다. 트레머리는 두발을 땋아 앞 정수리에 둥글게 고정시키는 머리모양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서민의 여인(트레머리, 1900): 구한말 조선의 서민 여인을 찍은 사진으로 카메라를 향한 시선이 자연스럽고 당차보이기까지 하다. 자세와 표정에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여인의 복장을 보면 저고리는 짧고 품도 작다. 질끈 동여맨 치마 위로 젖가슴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당시 구한말부터 개화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런 복장(가슴이 드러나는)을 한 여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미니저고리는 1700년대에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조선 후기부터 1930년대까지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복장이 유행했다.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다거나 성적인 것으로 풀이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복장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또한 여인의 머리를 보면 당시 유행하던 트레머리(얹은머리)를 볼 수 있다. 트레머리는 두발을 땋아 앞 정수리에 둥글게 고정시키는 머리모양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조선시대에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분홍색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자의든, 타의든 사람은 옷에 따라 그 말과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옷이 특정 집단이나 소속을 상징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든가, 제복을 입은 경찰이 그 집단에서 정한 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정해진 틀(옷)을 벗어던지는 순간, 이들은 그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범법 행위를 한 사람을 잡고 보니 경찰이었다든가, 판사나 검사 등 고위층 인사였다는 내용의 뉴스를 접해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제복을 입었을 때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그 어이없는 ‘용기’를 불어넣은 요인 중 하나는 사복이 자신의 신분을 감퉈줄 것이라고 착각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옷’은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고, 동시에 힘과 용기, 담대함을 주기도 한다. 소방관들이 그 뜨거운 불구덩이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도 제복이 주는 힘이다. 물론 남들이 갖지 못한 투철한 희생정신과 사명감이 바탕이 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옷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옛날 양반들은 비가 와도 절대 뛰는 법이 없다는 말처럼 말이다. 양반이 여차저차 하여 평민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갑자기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고 하면 그 양반이 뛰겠는가, 안 뛰겠는가.

구한말 기녀들의 옷과 일반 아녀자들의 옷에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한복을 입는다고 해도 치마의 색을 달리 하여 그 계층을 구분했다고 한다.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복장 규정이 매우 복잡하고 엄격해 때에 따라 입은 옷의 색과 모양이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은 여성들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핑크(분홍)색이 조선시대에는 당상관(정3품 이상)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는 꼭 이 분홍색 옷을 입었어야 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복식 간소화와 사치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넓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던 모습은 보기 어려워졌다. 대신 두루마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며 널리 상용화됐다.
 

나들이 복식(장옷, 1920): 장옷을 입은 여염집 아녀자가 장옷을 입고 있다.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 모습은 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나들이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던 옷으로 앞은 마주 여며지도록 고름을 달았고 속에서 이중 고름 하나를 잡아서 여몄다. 장옷은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는데 서민층과는 달리 치마와 유사한 쓰개치마를 사용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나들이 복식(장옷, 1920): 장옷을 입은 여염집 아녀자가 장옷을 입고 있다.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 모습은 조선시대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나들이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쓰던 옷으로 앞은 마주 여며지도록 고름을 달았고 속에서 이중 고름 하나를 잡아서 여몄다. 장옷은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는데 서민층과는 달리 치마와 유사한 쓰개치마를 사용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여염집 아녀자들은 장옷을 머리에 둘러 얼굴을 반쯤은 가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옷의 경우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으나 후대에 오면서 양반의 부녀자들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서민층과는 다른 점이 있었으니 바로 쓰개치마를 썼다는 것이다.

이렇듯 옷의 용도는 같으나 그 색과 모양에 차이를 두어 신분과 계층을 구분하기도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의복 간소화를 통해 사치를 막고 실용성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그렇게 길고 긴 역사를 거쳐 지금 ‘옷’은 특정 직업군을 나타낼 때를 제외하고는 제약을 두지 않게 됐다. 누구나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고, 옷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개화기, 그 시절 우리의 복식은 어떠했는지 사진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서민 부부의 복장(1910): 구한말 서민 부부의 모습이다. 을미년(1895년) 단발령이 선포되고 망건 사용이 폐지되면서 머리 모양의 변화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관모도 달라지게 됐다. 상투머리 대신 짧은 머리, 중머리, 하이칼라머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의관을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탕건이나 정자관을 쓰기도 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서민 부부의 복장(1910): 구한말 서민 부부의 모습이다. 을미년(1895년) 단발령이 선포되고 망건 사용이 폐지되면서 머리 모양의 변화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관모도 달라지게 됐다. 상투머리 대신 짧은 머리, 중머리, 하이칼라머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여전히 의관을 소중히 여겼던 이들은 탕건이나 정자관을 쓰기도 했다. (사진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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