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매미는 여름날 왜 저리 맴맴 소리 내고 있을까. 누군가는 말했다. 매미는 세상과 하직할 날이 얼마 안 남아 서러워서 밤낮없이 운다고. 매미는 유충 기간이 통상 3~7년 정도이고 지상에서 살 수 있는 기간은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이니 짧은 기간에 빨리 짝을 만나 2세를 생산해야 한다. 바둑 승부처럼 제한시간이 있고 짝도 못 만난 채 죽는 매미가 부지기수다. 매미 울음은 번식을 위한 본능이고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즉 수컷이 암컷 매미의 호감을 얻고 유혹하기 위한 구애행위라는 것이다. 그게 정확히 울음인지 노래인지는 모른다. 이때 목소리 큰 수컷 매미가 인기라고 한다. 그래서 목청껏 우렁차게 맴맴 거리려고 온 힘을 다한다. 그러다 보니 성가신 소음으로 느끼는 이들도 많다. 매미 소리를 소음측정기로 측정하면 75~80db(데시벨) 수준이다. 공사장 소음보다 높은 편이다. 특히 늦은 밤 도심의 매미 소리는 평온한 수면을 방해한다. 이에 따라 매미는 이제 한여름을 알리는 낭만적인 전령사가 아니라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참으며 응대해야 할 불청객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뒷산도 매미들의 아우성이 눈물겹다. 뒷산은 공원화해 구청이 행정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있다. 산책길이 비교적 청결한 편이고, 숲이 쾌적하고 향기로워 구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오르내리는 산책길은 늘 가로등이 켜져 있다. 매미들은 빛에 민감하다. 해가 뜨면 짝을 찾기 시작하고 해가 지면 잠든다. 매미들은 빛이 있으면 소리를 내고, 빛이 없으면 소리를 중단한다. 자정이면 가로등이 일제히 소등된다. 그러면 매미 울음이 딱 그친다. 그토록 소란스럽던 뒷산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 새벽 다섯 시면 가로등이 일제히 점등된다. 동시에 매미 울음도 시작된다. 출퇴근 시간이 어김없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떠오른다. 주민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시작과 끝이 틀림없다. 매미들은 햇빛인지 인공불빛인지 모른다. ‘자연산’인지 ‘양식’인지 구별 못 한다. 다시 말해 매미들은 사람들이 만든 인공조명에 속아 울음을 우는 것이다.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 잠 못 자겠다고 푸념하지만 인간사회의 조명이 없었다면 밤에는 조용했을 테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매미 소리가 우리네 생활 리듬에도 미치는 효과가 있다. ‘저녁형 인간’인 필자의 생활이 언젠가부터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었다. 해가 지면 매미와 함께 잠들고 새벽이면 매미와 함께 일어나는 날이 많아졌다. 사실 다 잠든 밤을 활용하면 독서나 명상에 참 좋다. 필자는 그동안 새벽 두세 시에 혼자 깨어 있는 시간을 보배처럼 소중히 여겨왔다. 그러나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음날 잠이 부족해 비몽사몽 헤매게 된다는 것. 반면 일찍 취침하고 새벽 다섯 시쯤 매미와 함께 일어나면 공기 맑은 아침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침’이라는 단어도, ‘시작’이라는 단어도 좋지 않은가. 늘 ‘아침’이었으면, 늘 ‘시작’이었으면 좋지 않겠는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산책 운동 명상 독서, 무엇을 해도 하루가 여유 있고 활기차다. 사실 현대 도시사회에서는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식물과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나는 생활, 해가 지면 잠들고 해가 뜨면 일어나 활동하는 생활이 보다 자연과 섭리에 순응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옛 선지식의 일화다. 당나라 때 장사 경잠(長沙 景岑)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처음 녹원(鹿苑)에서 제1세 주지로 있다가 나중에는 일정한 처소 없이 천하를 주유했다. 그리고 인연따라 중생을 만나고 청에 따라 법을 말해주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장사(長沙)화상이라 칭송했다. 제자가 물었다. “사람이 질문하면 화상께서 인연따라 대답해 주시지만 전혀 아무도 묻지 않을 땐 어찌하시겠습니까?” “곤(困)하면 눕고, (피로가) 풀리면 일어난다.” “학인이 어찌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까?” “여름엔 발가벗고 겨울엔 옷을 입느니라.” “죽은 승려는 어디로 갑니까?”

대사가 게송(偈頌)으로 대답했다. “금강 같은 몸임을 모르고/ 인연따라 생겼다 하지만/ 시방의 참다운 적멸이/ 누구에겐 있고 누구에겐 없으랴.(不識金剛體 却喚作緣生 十方眞寂滅 誰在復誰行)”

사람도, 매미도 언젠가는 죽는다. 사는 기간만 다를 뿐이다.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사람과 동식물이 다를 바 없다. 모두 존재의 섭리 속에, 은총 속에 있다. 오늘도 사바세계에서 탐욕을 좇아 냄새나는 아귀다툼을 벌이는 에고는 참나(眞我)가 아니다. 인도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에 의하더라도 참나는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참나 탐구는 자신을 향하는 일이니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씀이다. 그래서 중생(衆生)이 곧 부처이고, 무정물(無情物)에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 생활선(生活禪)이란 결국 현대 생활 속에서 자연과 하나인 우리 스스로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능하면 자연의 리듬과 흐름에 따라 살아야겠다. ‘곤(困)하면 눕고, (피로가) 풀리면 일어난다’는 선사(禪師)의 화두(話頭)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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