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유감.’ 남북 고위급협상이 타결된 직후 이 단어가 네이버 검색순위 1위에 올랐다. ‘유감’은 남북 공동발표문 2항에 들어있는 말이다. 많은 네티즌들은 판문점에서 나흘간 있은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의 분명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즉 “북한, 유감 말고 사과를 해야 하는데” “북한, 유감이라지만 당장 확성기 방송 중단하려고 하는 일종의 전략 아닐까” 등의 반응을 보였다. 북측이 최근 지뢰와 포격 도발에 대해 시인·사과하면서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하고 재발방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유감을 표명하였다”라고만 한 것은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북한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한 국민이 많았다. 북한은 늘 ‘도발→부인’으로 시종일관했다. 굳이 한민구 국방장관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차제에 잘못된 악순환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었다. ‘사과(apology)’와 ‘유감(regret)’은 어감상 차이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는 비슷한 외교적 용어이지만 ‘유감 표명’은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희망사항에 속한다. 최근 전방지역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며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연출한 북한 지도부가 아닌가. 북한 장병들 앞에서 지뢰와 포격 도발을 ‘남측의 자작극’ 운운했던 북측이 며칠 만에 시인과 사과로 돌아서며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하고 재발방지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하는 게 쉽겠는가. 일부 네티즌은 “북한에 유감이라는 단어를 얻어낸 것도 대단한 듯”이라는 반응도 나타냈다. 남북이 서로 다르게 해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사에 관한 일본 천황의 언급 등 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유감 표명은 국제사회가 대체로 사과의 뜻을 표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아닐까.

필자는 지난 23일 KTX편으로 부산에서 귀경하는 길에 옆자리에 앉은 한 영국 대학생과 남북관계 등에 관해 담소를 나눴다. 오웬이라는 이름의 그 영국 경제학도 청년은 이화학당 썸머스쿨에 참가한 기회에 한국을 처음 찾았다고 했다. 동·서독처럼 남북한이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이 되거나 협력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그는 북한의 무력 사용으로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는 전면전이 발생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국민들이 비교적 평온하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는 그는 유럽 언론에서도 한반도 상황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스마트 폰으로 영국 BBC방송 기사를 검색해 보여줬다. BBC는 복수의 스트레이트 뉴스와 심층 분석 기사 등으로 북한의 지뢰도발로 긴장이 고조된 비무장지대 상황과 고위급접촉을 자세히 소개했다. 25일 아침 다시 검색해 보았다. BBC는 협상 타결 소식과 함께 북측의 유감 표명에 대해 영어로 ‘express regret over the incident’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서 남북합의는 지뢰가 자신들이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북측이 (결국) 유감 표명에 동의한 후 이뤄졌다고 했다. CNN 방송도 들어보았지만 비슷한 내용이었다. 일부 외신은 ‘유감’이 애매모호한 표현이라고 했다. 하지만 BBC처럼 북한의 당초 입장과 일련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한다면 지구촌 시청자들도 합의문에 ‘유감’이란 표현이 처음 명기된 이번 합의의 함의(含意)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이명박 정부에서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잘못 다뤄졌었다는 생각이다. 우리 측이 북한 체제의 특수성을 외면하고 굳이 김정은 전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문서로 요구하다 금강산관광을 중단한 것은 전화(戰火)를 자초하는 면이 있다고 보았었다. 퇴로를 열어주지 않는 공격은 위험하다는 견해였다. 끝내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자금줄이 막힌 북한이 선택한 길이 무엇이었겠는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왜 일어났을까.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가 묶어놓은 족쇄 때문에 국면을 바꾸지 못했다. 이번에 군사적 충돌이 빚어질 수 있었던 상황을 대화·교류 국면으로 전환한 것은 의미가 크다. 회담의 열매가 상당히 실질적이라는 생각이다. 전면전까지 불사한다며 무력시위에 나섰던 북한이 먼저 회담을 제의하고 주체를 분명히 해 지뢰폭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 자체를 가볍게 볼 수 없다. 비무장지대가 다시 비정상적인 상태가 되면 북한 지도부가 부담스러워하는 확성기 대북방송이 재개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도 군사회담을 넘어 남북이산가족상봉과 민간교류 확대 등에 합의한 것이 큰 성과다. 남북당국자끼리 모처럼 밤을 새워가며 흉금 터놓고 물밑대화도 많이 나눴다니 다행스럽다.

북한은 첨단전자제품에 필요한 희토류 등 지하자원 매장량만 해도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는 자원의 보고(寶庫)이다. 북한 땅에 중·러·일 등이 침을 흘리고 있다. 우리가 뒷짐 지고 삐쳐 있는 사이에 그들이 다 챙겨가서야 되겠는가. 이제는 남북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며, 서로 돕고 협력할 것은 돕고 협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교류와 교섭이 ‘윈윈’으로 계속되고 서로에게 신뢰가 쌓인다면 오래 몸살을 앓아온 한반도 역사도 바뀔 수 있을지 않을까. 통일 한국이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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