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단기서(段祺瑞)는 안휘성 출신의 군벌로 북양의 호랑이라 불렸다. 1881년, 은덩어리 하나를 들고 2천리를 걸어서 산동성 위해로 아저씨 단종덕(段從德)을 찾아갔다가 이홍장(李鴻章)이 세운 북양무비학당 포병과에 들어가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889년, 관비로 베를린군사학교 포병과에 유학했다. 2년 후 귀국해 무비학당 교관이 됐다. 1895년, 원세개의 신식육군건설에 참여해 의화단을 진압하면서 북양군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왕사진(王士珍-용), 풍국장(馮國璋-표범)과 함께 북양의 호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24년 3월, 북경대학 25주년을 기념하는 여론조사에서 단기서는 손문, 진독수(陳獨秀), 채원배(蔡元培)보다 앞서 청년의 우상인 호적(胡適)와 나란히 선정됐다. 1926년, 하야를 발표하고 천진으로 물러났다. 일본의 관동군 특무대장이 제휴를 제안했지만 깨끗이 거절했다. 1933년 초, 장개석의 요청으로 일본인의 세력범위인 천진을 떠났다. 단기서의 제자였던 장개석은 군복을 입고 직접 역까지 나와 스승의 예로 맞이했다. 1936년 11월 2일, 위장병 발작으로 72세에 서거했다.

단기서는 군벌이었지만, 인격은 고상했다. 불추(不抽), 불갈(不喝), 불표(不嫖), 불도(不賭), 불탐(不貪), 불점(不佔)을 추구해 ‘육불총리’라는 평가를 들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채식을 즐겼으며, 실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박한 생활을 하며 물처럼 청렴했다. 모은 재산이 없었지만 돈을 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재물을 탐하던 시대에 그는 확실한 별종이었다. 청황제의 퇴위, 원세개의 홍헌제 저지, 장훈의 복벽 토벌 등 국가체제 결정에서 핵심역할을 해 ‘삼조공화(三造共和)’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적 권모술수와 무력에 대한 맹신은 오점으로 남았다. 양계초는 그에게 허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한 책임감은 누구도 비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집정이었을 때, 군경이 천안문광장에서 애국시위를 펼친 학생들을 살상한 318참사가 발생했다.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애도의 뜻으로 소식을 하겠다고 약속한 후 죽을 때까지 약속을 지켰다. 당시 고관들은 3명의 처와 6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단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미모와 기예를 갖춘 4번째 첩을 총애했다. 그녀에게는 이전부터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단기서는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성대하게 두 연인을 맺어주었다. 단기서는 평생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았다. 원세개의 양녀와 재혼하면서 부인 장씨 명의로 집 한 채를 얻었다. 원세개가 노름으로 딴 것을 준 것이다. 원세개가 죽은 후 집주인의 아들이 찾아와 돌려달라고 하자 깨끗하게 돌려주었다. 단기서는 평생 셋집에 살았다. 최고 권력자였을 때는 선물도 받지 않았다. 강소독군 제섭원(齊燮元)이 각종 보물로 부채를 상감한 병풍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대로 돌려보냈다. 장작림이 동북의 특산품을 보냈으나, 죽어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장작림의 부관이 물러나지 않자 물고기 두 꾸러미만 받았다. 유일하게 받은 것은 풍옥상이 보낸 커다란 호박이었다. 1926년, 여원홍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법정에 서기까지 했으니 치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자녀 가운데 6명이 요절했다. 장성한 자녀들은 아버지와 달리 평범했다. 조카 단굉강(段宏剛)이 주로 단기서를 측근에서 도왔다. 차녀 단굉빈(段宏彬)은 일찍이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100세에 죽었다. 삼녀가 부친을 모시고 관사에서 살았다. 단가의 가규는 매우 엄격했다. 단기서는 가족들이 공무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어떤 첩이 친척의 일로 청탁을 하자 단기서는 코를 실룩거리며 화를 냈다. 단기서는 화가 나면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실룩거렸다고 한다. 장남 단굉업은 어려서 친척의 집에 맡겼다가 10살이 돼서 데려왔기 때문에 교육이 부족했다. 사람들이 정부에 일자리를 주라고 권했지만, 단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녀들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기를 원했다. 동생 단기보가 관직을 달라고 하자, 약간의 돈을 주어 장사나 하라고 돌려보냈다. 하야한 후 생활비는 장개석이 전적으로 부담했다. 총리가 하야한 후 또 총리를 골라야 하는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인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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