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조아지신은 큰 공을 세웠지만 그저 심부름이나 하는 신하로 만족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권력을 노리는 자가 조아지신에 만족할 리는 없다. 남송 광종(光宗) 시기의 조여우(趙汝愚)는 외척 한탁주(韓侂冑)와 결탁해 고종황후 오(吳)씨에게 광종이 태상황을 핍박한다고 밀고해 조확(趙擴)을 영종으로 옹립했다. 송의 먼 종실이었던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철주야 학문에 매진해 마침내 진사가 됐다. 관운도 좋아서 승진을 거듭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여유정(呂留正)과 함께 정권을 잡았지만, 곧바로 궁정의 정변에 휘말렸다. 한탁주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앞세워 고관이 되려고 하자 조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친이고 그대는 외척이 아니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웠다고 자부하겠소? 조아지신으로 다른 이들의 포상이나 추천하는 것이 어떻소?”

모욕을 느낀 한탁주는 조여우에게 원한을 품었다. 남송 초기에 사대부들은 정이(程頤)의 이학(理學)을 중시하는 파와 왕안석(王安石)의 공리(功利)주의를 추구하는 파로 양분됐다. 견해가 달랐던 양 파는 끊임없이 논리적인 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당파로 변질돼 서로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효종과 광종이 제위에 있었을 때는 주희(朱熹)가 이학을 제창하며 명성을 날렸다. 조여우는 주희를 시강(侍講)으로 추천해 영종의 강학을 맡겼다. 주희는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시정(時政)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한탁주가 위세를 이용해 권력을 농간한다고 생각한 그는 강학을 이용해 영종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폐하께서 즉위해 10개월이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재상을 물리치시고 대간(臺諫)을 자주 교체하시며 모든 일을 독단하고 계십니다. 대신과의 상의는 고사하고 아예 의논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니, 이러한 폐단을 바꾸지 않으시면 신은 삼가 독단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세를 더욱 아래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주희의 의도는 한탁주의 권력농간에 대한 비판이었다. 한탁주는 주희를 방치할 수가 없어서 시강의 직책에서 내쫓았다. 조여우도 막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조여우는 한탁주를 아무 생각도 없는 욕심꾸러기로 여겼다. 그러나 한탁주가 먼저 대간들에게 손을 뻗어 언로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대간들은 조여우가 ‘종친으로서 사직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파면시키라고 주청을 올렸으며, ‘위학(僞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여우를 지지하는 자들을 내몰았다. 한탁주의 권세는 더욱 튼튼해졌다. 조여우는 한탁주가 어떤 인간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가 역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역사는 조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태로울 때에도 대계를 세웠으며, 밝은 인재들을 모아 영종의 새로운 정치를 보좌해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대를 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탁주의 올가미에 얽혀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정치투쟁의 잔혹성을 알지 못했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생각했다고 했지만, 권력투쟁에서 조여우의 안일하고 무능함을 답답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조여우가 대계를 세운 올바른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력투쟁에 한탁주라는 음모꾼의 꼼수에 밀린 것은 분명하다. 부패척결이라는 거창한 깃발을 내걸었던 총리가 한 기업가와의 관계를 부인하다가 부패한 정치가로 전락하며 자진사퇴했다. 옳고 그름만으로는 정치개혁을 이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투쟁에서는 대의도 중요하지만 치밀한 계략과 자기방어능력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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