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근대 유럽의 민주혁명은 봉건적 전제제도를 허문 역사적 진보였다. 그러나 전쟁을 강화한 측면도 있다. 1차 대전은 민주제도의 최전성기에 발생했다. 전쟁과 민주는 쌍둥이와 같다. 원시사회에서 성년 남자는 모두 전사였다. 이들은 무조건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원시적 군사민주제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의 부족전쟁은 총체적 성질을 지녔다. 군사민주제라는 용어가 전쟁과 민주정치 사이의 비밀을 폭로하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군의 방진(方陣)은 평민이 중심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무기로 집체적 전투대형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시민의 권력의식을 다졌다. 로마의 카이사르 시대에 종군과 시민권은 동의어였다. 미국 역사에서 수많은 흑인이 참전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했다. 해전은 민주정치 형성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종전에는 경제적 제약으로 참전하지 못했던 평민이 살라미스해전에 참전하면서 정치와 접촉했다. 당시 여론은 조타수, 조선공, 해군을 명문부호보다 중요한 국가의 동량으로 여겼다. 무산평민이 위주였던 영국함대는 알마타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근대민주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근대민주주의는 평민의 참전에서 비롯됐다. 시민권과 종군의무가 동시에 제도화됐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도 보통선거와 의무병역제도가 동시에 의회에 제출됐다. 대혁명 시기 프랑스는 봉건왕조에 의해 포위됐다. 프랑스는 국민개병제를 실행해 봉건왕조의 군사력에 대항했다. 나폴레옹의 공화국 군대는 봉건왕조의 군대를 두들겼다.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패한 후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했다. 콩드르세는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에서 보병의 흥기가 민주의 흥기와 직결됐다고 지적했다. 풀러도 소총이 근대민주주의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민주국가는 국민들에게 국가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국가가 소유한 인력과 물력은 모두 전쟁자원으로 쌍방의 소멸목표였다. 토인비는 민주사상이 왜 전쟁을 억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의 규모를 키웠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풀러는 토인비가 민주라는 신화에 함몰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하며, 평화는 내부, 전쟁은 외부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키루스의 아버지는 장군이라면 음모꾼, 사기꾼, 소매치기, 강도가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키루스가 도덕준칙과 어긋난다고 반박하자 아버지는 그것은 친구나 동포에게만 해당된다고 대답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정의는 친구를 도와 적을 해치는 것’이라고 했으며, 홉스는 ‘리바이어단’에서 ‘전쟁에서 위력과 속임수는 두 가지의 큰 미덕’이라고 했다. 데이비드 흄은 전쟁에서는 정의감과 동정심을 적의와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인류 자신이다. 인류의 본성은 토인비가 상상한 것처럼 아름다운 평화주의가 아니라, 오랫동안 선배들이 남긴 야만과 잔인함이다. 두려움은 가장 큰 보편적 심리로 인류의 본능을 형성했다. 이 점은 야만인과 문명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부족시대에 사람들은 언제 멸족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두려움은 현대인의 영혼에서 깊이 잠복해있다. 근대민주제도는 국가라는 방대한 집단단위를 형성했다. 그러나 정당하건 왜곡됐건 구성원 모두에게 외부집단에 대한 도덕준칙, 감정과 관념을 준수하며 깊은 원한을 품고 전쟁에 참가하라고 부추긴다. 근대민주제도는 전쟁의 총체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력을 제공하는 기초가 됐다. 그 근저에는 공포로 가득 찬 군중심리가 작용한다. 토인비의 의문은 풀러가 ‘민주의 원동력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원한’이라는 말로 풀었다. 민주제도는 내부집단의 모든 도덕, 감정, 관념을 움직여 자신의 역량을 형성함으로써 외부집단을 소멸시키려는 의지의 체현인 셈이다. 내부집단의 원칙인 사랑을 이용해 외부집단에 대한 원한을 해결하는 목적이 민주제도였다. 1차 대전은 자유와 평등을 앞세운 민주제도가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민주제도는 전쟁을 더욱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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