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세상사를 ‘O’나 ‘X’라는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분류, 집합, 통계와 같은 계량적 개념은 사물과 현상을 단순화시켜서 인식하기 편리하게 만든다. 계량화에 대한 신뢰는 근대 과학의 신앙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계량화를 하기가 어려운 개념들이 더 많다. 두 사람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가정해보자. 둘 다 재미있었다고 해도 그 ‘재미’를 수치화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적(情意的) 판단은 객관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꾸준히 만물에 내재된 일반적, 객관적인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과학은 동일한 조건이라면 언제, 어디서, 누구나 동일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현상에서도 이러한 법칙을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사회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의 세계에서도 절대적이라는 개념이 허구라는 사실이 이미 증명됐다. 그러므로 사회학에서 절대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일정한 권위를 갖춘 사람들이나 매스컴을 통해 발표되는 ‘절대적’이라는 말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다. 설득력이 있으므로 이러한 말들은 매우 선동적이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발표될 때는 더욱 위력을 과시한다. 사람들은 권위에 매몰돼 그러한 논리의 이면에 있는 다양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다양성이 더욱 확대되는 현대사회에서 피로감을 느낀 대중들은 양분법적 논리에 쉽게 빠져든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는 영웅이 등장하기도 쉽고 사라지기도 쉽다. 제갈량도 이분법적 논리로 대항하는 선동가들로부터 시달렸다. 유비의 죽음 이후 촉한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제갈량이 국론통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반란지역에 현지출신을 지방관으로 등용한 것은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했을 때 예상되는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선동가들은 촉한정권의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외지출신의 침입자들이라는 점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들은 제갈량이 백성들의 아들과 재산을 동원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호전주의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들의 선동은 백성들에 그치지 않았다. 후주 유선도 그들의 대상이 되어 수시로 흔들어 댔다. 제갈량은 위가 촉한의 내부분열을 유도하면서 강경파를 고립시킨다고 생각했다. 위는 긴장상태만 장기적으로 유도하면 약소국은 저절로 무너진다고 판단했다. 제갈량은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군주가 누구이든지 자신들의 생존과 이권이 보장되면 그만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진다고 하지만 흑백논리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일을 꾸미거나 앞장서지 않는다. 누군가 앞장서서 추진하면 가만히 지켜보다가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문제점을 교묘하게 꼬집어 낸다. 제갈량이 ‘시빗거리만 찾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분법적 논리는 다양성을 부정한다.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현실적이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비현실적일 수도 있으므로 흑백론자들은 현실주의자들의 과오를 격렬한 비판하고 대중은 그들의 비판에 광분한다. 제3의 존재를 인정할 때 타협이 가능하다. 다양성이 특징인 현대사회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타협이 중요하다. 타협이 야합으로 인식되는 사회는 변화를 모색하지 못하고 갈등만 조장될 뿐이다. 흑백론자들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이나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본다. 카이자르도 키케로를 비롯한 반대파들의 맹비난을 견디다 못해 ‘나는 보이지 않는 것도 본다’고 비꼬았다. 사회나 조직의 발전은 치열한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자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 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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