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헝가리의 어떤 시인은 ‘생명은 귀하고, 사랑의 가치는 더 높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다면 두 가지 모두를 버려도 좋다’고 했다. 피끓는 젊은이들에게 진보와 자유를 추구하라는 뜨겁고도 냉정한 명언이다. 시인에게는 생명보다 자유가 귀했다. 약 2천여년 전, 묵자는 생명보다 천하의 공리(公利)를 위한 ‘의’가 귀하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한마디의 말 때문에 죽기도 한다. ‘의’가 자기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묵자가 중시한 것은 바로 ‘한마디의 말’인데 이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상대를 죽이는 필부의 용기와는 다르다. 묵자의 ‘한마디 말’은 ‘의’와 천하의 공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이다. 유가에서도 ‘살신취의(殺身取義)’ 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다. 이 점에서는 묵가와 유가의 사상적 맥락이 같다. ‘사생취의’ 즉 의를 지키기 위해 생명도 버린다는 말은 묵자의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묵가의 제자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자 교리였다. 묵가의 제자들은 천하의 이익을 위해 천하의 해악을 제거한다는 종지를 지키려고 기꺼이 몸을 던졌다. 불로 뛰어들고 칼날을 밟아서 죽더라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천하의 공리를 위한 묵가의 희생정신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했다.

‘여씨춘추 상덕(上德)’에는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묵가의 비장한 이야기가 있다. 몇 글자밖에 되지는 않지만,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맹승(孟勝)은 금활리에 이어 묵가의 제3대 지도자인 거자(鉅子)가 됐다. 그는 초의 작은 제후였던 양성군(陽城君)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양성군은 다른 70여 가문과 함께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를 제거하기 전에 자기의 근거지를 맹승에게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옥황(玉璜)을 잘라 부절로 삼고 반쪽이 맞는 경우만 별도의 행동을 한다고 결정했다. 양성군과 일당은 초의 도왕(悼王)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던 오기를 공격해 부상을 입혔다. 왕의 시신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죄로 삼족이 멸하게 되자 자기 나라로 도망쳤다. 초군이 추격했다. 맹승은 ‘말은 지켜야 하고,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묵가의 교리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쌍방의 전력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성을 지킨다는 것은 죽겠다는 의미였다. 묵가의 제자 서약(徐弱)은 희생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맹승은 단호했다.

“나는 양성군의 스승이자 친구이다. 지금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지 않으면, 엄격한 스승을 구하는 사람들이나 현명한 벗을 구하는 사람들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구차하게 생명을 지킨다면 묵가의 진정한 정신은 사라진 셈이다. 묵가의 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서 죽어야 묵가의 대업이 이어진다. 나는 송(宋)의 전양자(田襄子)에게 후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면 묵가의 맥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제가 먼저 죽어서 선생님께서 저승으로 오시는 길을 닦겠습니다.”

서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먼저 죽었다. 맹승은 죽기 전에 제자 두 명을 전양자에게 보내 거자의 직분을 위임했다. 맹승이 죽자, 제자 180명도 따라서 죽었다. 전양자에게 갔던 두 제자도 양성으로 돌아가 죽으려고 했다. 전양자는 나를 거자로 임명하셨으니,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두 제자는 기어코 양성으로 돌아가 죽었다. 여씨춘추에서는 두 제자가 새로운 거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불찰(不察)’이라고 논평했다. 허유휼(許維遹)은 신임 거자의 만류를 듣지 않은 두 제자의 불찰이라고 했지만, 우성오(于省吾)는 두 사람을 만류한 전양자의 불찰이라고 주장했다. 묵가 180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벗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전통을 확인시켜준다. 의는 믿음에 대한 보답이다. 의가 사리진 세상은 삭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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