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조선의 최대관심사는 명종의 외아들 순회(順懷) 세자의 부인 덕빈 윤씨의 장례식과 시호에 관한 문제였다. 윤씨는 11살에 과부가 됐으며, 세자의 4촌 선조가 뜻밖에 왕이 됐다. 윤씨는 29년 동안 창경궁에서 부처님을 섬기다가 40세에 죽었다. 선조는 왕후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논쟁이 시작됐다. 의논이래야 상복착용과 참석의 범위, 제사상에 올릴 소와 양의 선택과 같은 문제였다. 시호를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망자에게 어울릴 두 글자를 정하기는 어려웠다. 유식한 신하들은 인(仁), 정(貞), 효(孝), 혜(惠)를 내세워 해박함을 자랑했다. 시호가 결정되지 않으니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했다. 왜란발발 보고는 1592년 4월 17일에 도착했다. 중신들은 윤씨의 시신에 곡하고 오늘은 기필코 시호를 결정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산해(李山海)의 중재로 북인의 ‘공(恭)’과 남인의 ‘회(懷)’를 섞어 ‘공회빈’으로 결정했다.

중신들에게 일본군이 침입했다는 장계가 도착했다. 웃고 떠들다가 모두 조용해졌다. 공포가 밀려오자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산해가 임금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선조는 그때까지 일어나지도 않았다. 중신들은 고작 미개한 왜군에 불과하다고 성토하고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유성룡과 몇 사람이 모여 내놓은 대책은 고작 신립(申砬)이나 이일(李鎰)과 같은 명장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신립은 제1의 명장이니 이일을 보내자고 결정한 후 안심하고 귀가했다.

다음 날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됐다는 급보를 받은 조정은 조금 더 다급해졌다. 초조해진 선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은 삼포왜란 정도일 것이며 일본군은 수전에는 강하지만 육전은 약하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수전에서는 참패를 했지만 육전에서는 연전연승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일국의 국방을 책임진 자의 판단이 그 정도였을 뿐이다. 조정은 이일이 왜군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라고 기고만장해졌다.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것이다.

다음 날도 위급한 보고가 잇달았다. 오랜 평화에 안일해진 정부는 군사에는 문외한인 문관을 고을 수령으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군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넋이 나가 있을 때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이 결사대를 조직해 출전하겠다고 자원했다. 선조도 덩달아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신하들도 따라나섰다. 약삭빠른 이산해가 군주의 출전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만류했다. 선조도 신하들도 다행으로 여겼다. 신립이 전쟁은 장군들의 몫이라고 하자 특공대를 조직하겠다던 이원익은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위기관리능력이 이렇게 허술했을까? 조선은 건국 후 200년 동안이나 외침을 받지 않았다. 몽골족은 북방의 초원에 가뭄과 추위가 닥치자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중국도 오랜 평화를 누렸다. 조선과 명은 일본의 정세변화를 주시하지 않았다. 대가는 참혹했다. 임란에 출병한 명은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망했다. 조선은 명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또 외교적 오판으로 여진족에게 두 번이나 혼쭐이 났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다가 상대가 경계심을 풀었을 때 발생한다. 북한과의 교섭이 강화돼 위협이 없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국방에 대한 위협은 사라질까? 오히려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지금보다 더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국방은 여전히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적에 대한 증오심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증오해야 할 상대는 누구일까? 북에는 아직도 막강한 군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북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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