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제갈량(諸葛亮)은 융중(隆中)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던 시절을 ‘난세에 구차하게 성명을 보전하면서도, 제후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진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후광으로 상류사회에 진입했기 때문에 원했다면 쉽게 출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군자이자 권력의지가 부족한 형주목 유표(劉表)를 섬기기는 싫었다.

제갈량은 하찮은 공명(功名)이나 녹봉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골마을 융중에 은거했지만, 세상사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조석지변인 천하대세를 주시하며, 정치의 중심 양양을 자주 찾아 정보를 수집하여 당대의 명망가들과 토론했다. 그러한 바탕이 없었다면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을 때 천하삼분이라는 대계를 제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불구문달’은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대상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그는 늘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와 비교했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의 유명한 정치가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대개혁을 단행하여 제(齊)를 당대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환공은 튼튼한 내치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규합해 천하를 호령하며 패자로 군림했다.

악의는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을 섬겼으나 왕이 반란군에게 포위돼 아사하자, 위(魏)로 망명했다. 연소왕(燕昭王)은 제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자 복수하려고 자세를 낮추어 인재를 거두려고 했다. 마침 위의 사신으로 연에 왔던 악의는 소왕의 신하가 됐다. 악의는 한(韓), 조, 위, 초(楚)와 연합해 제군을 대파하고 제의 수도 임치(臨淄)까지 함락했다. 악의는 6개월 동안 제의 70여개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소왕이 죽고 계위한 혜왕이 전단(田單)의 반간계에 속아 악의를 소환하고 기겁(騎劫)을 장수로 임명했다. 위협을 느낀 악의는 조로 망명했다. 악의가 없어지자 전단은 즉묵(卽墨)에서 연군을 대파하고 실지를 회복했다. 명장을 잃은 혜왕은 진심으로 악의에게 사과했다. 혜왕은 악의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昌國君)으로 삼고 악의에게 연과 조를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했다. 이때 악의가 연왕에게 보낸 ‘보연혜왕서(報燕惠王書)’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명문이다.

제갈량이 관중과 악의를 목표로 삼은 것은 명재상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대들은 나라의 한쪽 모서리에서 공업을 쌓을 수 있겠지만, 자신은 관중과 악의처럼 불세출의 공업을 쌓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는 명군을 도와 군벌의 난동을 평정하고 한왕실을 부흥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조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산골 유중의 청년 지식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제갈량을 허풍쟁이로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사실로 인정했다. 그들은 제갈량의 ‘불구문달’은 용의 겨울잠처럼 일시적인 휴식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와룡(臥龍)’이라 불렀다.

제갈량은 조조를 필생의 원수로 여겼다. 조조가 잔혹한 살육을 저지르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 낭야는 조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됐고, 그 때문에 고향을 떠나 타지를 전전했던 처절한 경험은 한왕조 부흥이라는 집념으로 변했다. 벗 맹공위가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제갈량은 왜 인재가 넘치는 곳으로 가려느냐고 말렸다. 액면 그대로 보면 중원에서는 재능을 펼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지만, 사실은 조조에게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형주는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 유표가 한실의 종친이자 남양군은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의 고향이기 때문에 한왕조를 정통으로 여기는 관념이 강했다. 제갈량은 형주를 토대로 전한시대의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재현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송지가 무너지는 권력을 되살리려는 것을 소임으로 생각한 것을 은근히 비판한 것처럼 제갈량의 한계는 대세의 변화를 무시한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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