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동산재기(東山再起)
[고전 속 정치이야기] 동산재기(東山再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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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관대함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관대하려면 우선 느긋해야 한다. 느긋하려면 낙관적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태도를 보이면 국민들이 안심한다. 이러한 덕목으로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동진의 사안(謝安)이다. 그는 명문세가 출신으로 자를 안석(安石)이라 했다. 4세에 명사 환이(桓彛)가 크게 될 아이라고 예언했다.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생각이 기발했으며 풍모도 당당했다. 왕희지(王羲之)로부터 행서를 익혀 대가라는 평을 들었다. 신언서판을 겸비한 셈이다. 재상 왕도(王導)도 사안의 기량을 매우 중시했다. 소년 시절에 이미 상류사회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출신과 명망에 의지해 고관후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급 관리로 임명됐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왕희지, 허순(許詢) 등 명사들과 어울렸다. 손작(孫綽)과 바다에서 배를 타고 놀았는데 파도가 일렁거리자 모두 놀랐지만 사안만은 휘파람을 불며 태연자약했다. 선원은 사안이 배를 많이 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풍랑이 크게 일자 사안은 느긋한 말투로 언제 돌아갈 것이냐고 물었다. 선원은 비로소 배를 돌렸다.

동생 사만(謝萬)이 일찍 출세해 변방에서 중임을 맡았다. 명사 유담(劉惔)의 누이였던 사안의 아내가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세했는데 당신은 대장부가 되어 욕심이 없느냐고 따졌다. 사안은 낮은 소리로 화근을 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사만이 북벌에서 실패하자 사씨의 권위가 흔들렸다. 사안은 40세에 비로소 동산에서 나와 관직을 맡았다. 이를 ‘동산재기’라 한다. 당시 최고 권력자 환온(桓溫)의 막하로 들어갔지만, 마침 사만이 죽자 장례를 핑계로 환온과 헤어졌다. 환온은 북벌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황제를 바꾸었다. 그러한 환온이 입경하자 사안과 왕탄지(王坦之)가 영접 책임을 맡았다. 환온은 중무장 병력을 배치하고 일행을 맞이했다. 왕탄지는 겁을 먹고 식은땀을 흘렸지만, 사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제후의 행차는 사방에서 경호한다고 들었는데, 명공께서는 담장 뒤까지 배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환온은 웃으면서 병력을 물러나게 하고 오래도록 담소하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왕탄지와 사안의 우열이 결정됐다고 평가했다. 환온은 죽기 전에 원굉(袁宏)을 시켜 왕위에 해당하는 구석(九錫)을 달라는 표를 올렸다. 사안은 환온이 곧 죽을 것이라고 판단해 열흘이나 문장을 고치며 시간을 끌었다. 과연 환온이 죽자 구석에 대한 안건은 자연적으로 소멸됐다.

당시 전진(前秦)은 부견(苻堅)의 통치를 받으며 날로 강성해졌다. 사안은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의 조카 사현(謝玄)에게 장강 하류에서 강북을 잇는 방어선을 맡겼다. 사현은 광릉에서 유명한 북부병을 양성했다. 사현은 전진과 동진의 비수대전 전초전에 해당하는 회남대전에서 북부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83년, 부견이 100만 대군이라 자칭하며 동진을 침범했다. 모두 공포에 휩싸였지만 사안은 사현을 비롯한 젊은 장군들에게 8만의 병력으로 막게 했다. 긴장한 사현이 고별인사를 하며 대책을 물었지만 사안은 별도의 조치를 취해두었다고만 말했다. 사현은 나중에 장현(張玄)을 보내 다시 물었다. 사안은 친구들과 놀다가 장현에게 바둑이나 두자고 권했다. 고수였던 장현은 몇 번이고 패했다. 나중에 비수대전에서 전진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도착했을 때 사안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첩보를 힐끗 본 그는 태연하게 계속 바둑을 두자 손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안은 담담하게 아이들이 적을 격퇴했다고 대답했다. 손님이 떠나자 사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면서 치아가 모두 부러졌다.

385년 4월, 사안은 천하의 안정을 선언하는 것처럼 가족과 함께 물길을 따라 동산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 군대에 휴식을 주라고 당부했다. 사안의 자와 왕안석(王安石)의 이름은 같다. 금릉으로 은퇴한 왕안석은 사안이 살던 곳을 사서 저택을 짓고 집안에 사공돈(謝公墩)이라는 언덕을 만들었다. 그는 우스개삼아 시 한 수를 지었다. ‘공은 가고 나는 왔으니 이 언덕은 내 것인데(公去我來墩屬我), 언덕의 성씨도 공을 따라가지 말아야 하지 않겠소(不應墩姓尙隨公).’ 누군가 죽은 사람과 땅을 놓고 싸웠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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