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왕맹(王猛, 325~375)은 지금의 산동성 웨이팡(濰坊) 출신으로 자를 경략(景略)이라 했다. 그가 출생했을 때 후조의 석륵(石勒)이 북방을 석권하고 남방으로 예봉을 돌려 회수에서 동진(東晋)과 대치했다. 석륵의 후계자 석호(石虎)는 살인을 놀이처럼 좋아한 폭군으로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다. 왕맹은 가족들을 따라 떠돌다가 하남과 하북의 접경인 위군에 정착했다. 어린 왕맹은 생계를 위해 소쿠리를 팔았다. 어느 날 낙양까지 갔다가 높은 가격으로 소쿠리를 사겠다는 사람을 만났다. 마침 가진 돈이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왕맹이 따라가니 깊은 산속에 백발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맹이 절을 하니 노인은 대인이 될 사람에게 절을 받을 수 없다고 만류하고 소쿠리를 샀다. 산을 나와서야 그곳이 중악 숭산(嵩山)이라는 것을 알았다. 왕맹은 노인을 스승으로 삼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풍운의 변화를 관찰했다. 고달프게 살았지만 수불석권하며 각종 지식을 널리 습득했다. 작은 일에 개입하지 않았고, 하찮은 무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번잡한 예절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행동했다.

석호가 죽은 후 북방은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염민(冉閔)이 조를 무너뜨리고 위를 세우고, 선비족 모용씨가 염민을 무너뜨리고 전연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저족(氐族)이 두각을 나타냈다. 석호에게 강제로 업성으로 끌려갔던 저족은 부홍(苻洪), 부건(苻健)을 거치면서 관중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전진을 세웠다. 351년, 동진의 환온(桓溫)이 서안의 동쪽에 주둔하자, 왕맹은 소박한 차림으로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여러 명사들 앞에서 종횡무진 천하대사를 논하는 왕맹에게 관중의 호걸들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왕맹은 환온이 장안을 지척에 두고 공격하지 않는 속내가 전력을 아껴 동진 내부의 권력다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호걸들이 호응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환온은 반나절이나 침묵하다가 강동에서 이보다 나은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왕맹은 환온의 초빙요청을 거절하고 화산(華山)으로 돌아갔다. 사족이 기반을 다진 동진에서는 할 일이 없고, 환온이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도왔다가 이름을 더럽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진의 정권은 부건의 조카 부견(苻堅)에게 넘어갔다. 박학강기(博學强記)했던 부견은 경세제민과 통일천하라는 대지를 세웠다. 상서 여파루(呂婆樓)가 왕맹을 추천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부견은 유비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처럼 기뻐했다. 왕맹은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뛰어난 정책을 제시했다. 황태후의 동생 강덕(强德)이 포악한 짓을 자행하자 보고도 하지 않고 죽였다. 부견이 태후의 부탁을 받고 사면장을 보냈지만 강덕의 시신은 이미 거리에 널려 있었다. 왕맹은 어사중승 등강통(鄧羌通)과 함께 불법을 저지른 귀족 20여명을 죽였다. 비로소 세력가들의 불법행위가 사라졌다. 부견도 오늘에서야 천하에 법이 있고, 천자의 존귀함을 알았다고 감탄했다. 잘 자란 나무는 바람이 꺾고, 행실이 고상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한 왕맹은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유능한 인물을 등용했다. 부견은 내외의 군국사무를 모두 왕맹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조당에 단정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고 토로했다. 왕맹은 피로가 누적되어 중병에 걸렸다. 부견은 친히 명산대천을 찾아 쾌유를 빌었다. 왕맹의 병이 잠시 호전되자 대사면령을 내렸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3차례나 관을 잡고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게 하려고 경략을 빼앗아갔다고 통곡했다. 시호를 무후로 정하여 제갈량과 같다고 규정했다.

부견은 자기와 왕맹을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보다 20살이나 많았지만, 부견은 왕맹보다 13살이나 어렸다. 왕맹이 51세에 죽었을 때 부견은 38세였다. 큰형님, 스승, 최고의 도우미를 잃은 부견은 너무 슬퍼하다가 반년 사이에 백발로 변했다. 반년 동안 부견은 왕맹의 당부에 따라 국사를 처리했다. 그러나 북방을 통일한 후 왕맹의 당부를 잊고 동진을 정벌하다가 비수에서 대패하고 멸망했다. 백양(栢楊)은 ‘왕맹 이전에는 제갈량, 이후에 왕안석이 있었다. 제갈량은 군사상 성취가 부족했고, 왕안석은 강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왕맹이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인재 부족은 없어서가 아니라 찾는 이의 안목과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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