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를 마무리한 사마씨의 서진은 내분으로 단명했다. 창업군주 사마염(司馬炎)이 멍청이 사마충(司馬充)을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에 혈족끼리의 내분이 발생했다. 용병으로 참여한 북방민족이 중원에서 세력을 떨쳤다. ‘오호십육국시대’라는 전대미문의 군웅할거시대가 300년 이상 계속됐다. 혼란의 시대라지만 관점을 달리 보면 다양한 민족과 인물들이 각자의 문화와 기량을 시험한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유곤(劉琨)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서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라 하니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劉備)와 동족인 셈이다. 가남풍(賈南風)의 조카 가밀(賈謐)은 귀족의 자제들과 함께 시를 짓고 놀며 ‘금곡이십사우(金谷二十四友)’라 불렀다. 유곤 형제도 그 멤버였다. 내란에서 유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승진했다. 뛰어난 인간적 매력과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팔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집권한 사마월은 그를 병주로 보내 북방민족을 다스리게 했다.

유곤은 폐허나 다름이 없던 진양을 1년 만에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바꾸었다. 남에는 강력한 흉노의 조(趙), 북에는 굴기하기 시작한 선비의 대(代), 동에는 라이벌 왕준(王浚)이 있었다. 유곤은 선비를 끌어들여 석륵(石勒)을 비롯한 용장들과 승부를 다투었다. 건흥4년(316), 석륵에게 패하여 단신으로 단필제(段匹磾)에게 도망쳐 결의형제를 맺었다. 유요가 장안을 공격하여 민제를 사로잡았다. 서진이 망했다. 건무원년(317), 단필제가 유곤을 대도독으로 삼아 석륵을 공격했다. 단필제의 아우 단말배(段末柸)는 석륵에게 뇌물을 받고 진군하지 않았다. 유곤은 약세를 자인하고 철수했다. 태흥원년(318), 단말배가 선우로 자처했다. 유곤의 아들 유군(劉群)은 포로가 됐다. 단말배의 후대를 받은 유군은 부친에게 밀서를 보내 함께 단필제를 공격하자고 요청했다. 밀서가 발각되자 단필제는 유곤을 하옥했다. 동진의 권신 왕돈(王敦)이 단필제에게 밀사를 파견해 유곤을 죽이라고 부탁했다. 유곤은 아들 유준에게 ‘왕돈의 사자가 온 것을 나에게 알리지 않으니 나를 죽일 것이다. 생사는 명에 달렸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죽으니 부모를 만날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단필제는 황제의 조칙을 핑계로 유곤을 죽였다. 당시 나이는 48세에 불과했다.

유곤과 조적(祖逖)은 하급관리였을 때 침식을 같이 할 정도로 정이 두터웠다. 두 사람은 공업을 세워 국가의 동량이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나누었다. 어느 날 밤중에 조적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유곤에게 하늘이 우리를 더욱 정진하라는 소리라고 말했다. 유곤은 밖으로 나가 검무를 추며 무예를 수련했다. 문계기무(聞鷄起舞)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유곤은 호가(胡笳)를 잘 불었다. 흉노가 진양을 포위한 적이 있었다. 유곤은 엄밀히 수비하면서 원군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7일이 지나도 원군이 오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유곤은 성루로 올라가 적진을 바라보며 대책을 궁리했다. 갑자기 ‘사면초가’라는 고사가 떠올랐다. 그는 군사들에게 모두 호가라는 피리를 만들라고 명했다. 호가악대가 구성됐다. 적을 향해 ‘호가오롱(胡笳五弄)’이라는 곡을 불었다. 처량한 소리에 흉노군의 마음이 흔들렸다. 밤중에 다시 호가를 불자 고향생각이 난 흉노군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대사마 환온(桓溫)은 늘 사마의(司馬懿)나 유곤과 같은 일류 인물로 자처했다. 누군가 왕돈과 비교하면 몹시 불쾌했다. 북벌에서 돌아오며 유곤의 늙은 여종을 데려왔다. 노비가 환온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유곤과 흡사하다고 말했다. 환온이 기뻐서 어디가 닮았느냐고 물었다. 노비는 ‘얼굴은 흡사하지만 박약하고, 눈도 흡사하지만 작으며, 수염도 매우 흡사하지만 아쉽게도 붉고 짧고, 목소리도 매우 흡사하지만 아쉽게도 약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환온은 흥이 사라지며 며칠 동안 울적했다. 혼란했지만 싱싱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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