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은 ‘가도정명(假道征明)’ 즉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부산과 동래를 공격하면서 일본의 침략목적은 명나라이므로 조선이 길을 열어준다면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일본군의 침입전략은 교묘했다. 이 구호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일본과 모의해 중국을 칠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조선이 지원을 요청하자, 명의 조정에서는 중국군을 유인하려는 조선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다. 이 전쟁은 임진년인 1592년에 시작돼 1598년인 기사년에 마무리되기까지 7년 동안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적 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꾸노에끼(文祿之役)’라고 부른다.

이 무렵 유럽은 1492년에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1451~1506)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지원을 받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출항했다가 뜻밖에 오늘날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의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 발견 5년 후에 포르투갈 출신 바스코 다 가마(1469~1524)가 마누엘1세의 후원으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유럽의 욕망은 오스만투르크가 가로막은 육로를 피해 바다를 이용해 아시아로 향했다. 일본은 오랜 센가꾸(戰國)시대를 마무리하기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부하에게 암살된 후 재빨리 상황을 수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정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내전을 마무리했다. 중국과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를 차단한 것과 달리 일본은 노부나가가 네델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병기인 조총을 전투에 활용하면서 냉병기 시대에서 열병기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하급무신출신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힌 망상가였다. 신무기로 무장한 당시 일본의 육군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훗날 메이지(明治)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황당한 명분으로 아시아를 침략한 전초전에 해당하는 ‘가도정명’을 구실로 일본에서는 할 일이 없어진 전쟁기계들을 조선으로 밀어 넣었다. 그로서는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계획이 성공하면 해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양수겹장식의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이 시기에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각국은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눈을 들리지 못하고 전통적인 유가적 세계관에 안주한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의 선각자들은 시대적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운서주굉(雲棲袾宏), 자백진가(紫栢眞可), 감산덕청(憨山德淸), 우익지욱(藕益智旭) 등의 고승들이 유교와 도교를 불교와 융합시키기 위한 거대한 사상적 개혁을 주도했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관방학을 넘어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린 유교는 이 무렵 성리학과 예교논쟁으로 시대적 변화를 간과하고 내부의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休靜)은 불교 내부적으로는 교종을 선종의 과정으로 끌어들여 융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는 불교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삼교일원론의 기원을 마련했다. 그의 법통을 받은 사명대사는 불교에 안주하지 않고 평소에 유학자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했다. 참혹한 전쟁은 사명대사에게 불법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게기가 되었다. 그것은 하화중생에 중심을 둔 보살도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