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일상 버릇처럼 새벽에 현관문을 열고 배달된 조간신문을 집어 든다. 그리고선 방에 들어와 신문을 펼친다. 어느 신문부터 먼저 볼까 하다가 천지일보 지면을 천천히 펼쳐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큰 제목만 대충 읽고 내려가는데 몇 장 들치다보니 글자가 빽빽하게 써져있고 글자 밑에 군데군데 빨간색으로 밑줄이 쳐져 있는 특이한 게 있었으니 전면광고였다. 지면 오른쪽 밑에 조그마한 글씨로 “좋은 물만 많이 마셔도 건강해져”라는 광고문이 있었다.

‘무슨 광고가 이래’ 생각하면서 본문 제목을 보는 순간 필자는 마치 무지개라도 보듯 가슴이 두근거리며 정신이 바짝 든다. 페이터의 산문(散文)이 아닌가. 이 글은 한국 수필계를 풍미했던 이양하 선생(1904∼1963)이 쓴 글로 필자가 고교 국어교과서에서 읽어본 후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명수필이다. 또 ‘수필가 이양하’ 하면 ‘나무는 덕(德)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로 시작되는 선생의 수필 ‘나무’도 기억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애독(愛讀)하는 서적을 제한하여 이삼 권 내지 사오 권만 들라면, 나는 그중의 하나로 옛날 로마의 철학자(哲學者),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暝想錄)을 들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겠다. 혹은 설움으로, 혹은 분노(憤怒)로, 혹은 욕정(欲情)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모든 일이 뜻 같지 아니하여, 세상이 귀찮고, 아름다운 친구의 이야기까지 번거롭게 들릴 때, 나는 흔히 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 황제를 생각하고, 어떤 때에는 직접 조용히 그의 명상록을 펴본다. …’로 시작되는 그 광고문의 글을 단숨에 읽어 내려간다.

오랜만에 단어의 하나하나가 경구(警句)처럼 새겨지고 문장의 한 단락, 한 단락이 깊은 의미로 더해지는 글을 대하다보니 읽는 족족 머리가 맑아지고 인생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러면서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라 복잡한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런 흐름의 글을 한 번이라도 접하고서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참 인생의 가치를 일깨우는 게재로 삼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혼자 읽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사람의 칭찬 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判官)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死後)에 칭찬받기를 바라거든, 후세(後世)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名聲)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戀戀)해 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 하여 이 세상에 사라지고, 기억자체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하 중략)’

지금 필자는 이양하 선생의 주옥같은 수필을 읽고서 그에 도취해 느낌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요는 값비싼 일간신문의 전면광고에서 어떻게 하여 ‘페이터의 산문(散文)’이 게재됐는가 하는 문제다. 특히 어떤 광고주라도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자기 회사의 상품에 연연하기 마련인데, 유명 작가의 명(名)문장이 전면광고를 차지하고 진작 상품 광고는 귀퉁이에 조그맣게 소홀히 다루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궁금하던 차에 필자는 인터넷으로 판매원 회사와 ‘강송식’을 쳐보았더니 여기저기서 자료가 나온다. 종합해보면 올해 76세인 강송식 사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인기 있는 영어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1985년에 사업가로 변신한 인물이다. 당시 자신의 건강도 보살필 겸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물을 제공하겠다는 기업 사명으로 창업했고, 지금까지 좋은 물 만들기에 정성을 바치면서 오로지 한 우물을 파왔던 물 관련 전문 기업인인데, 박원순 서울시장의 은사(恩師)로 그에게 꾸지람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멘토 중의 한 분으로 소개돼있다.

광고는 판매를 목적으로, 상품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소비자에게 널리 알리는 의도적인 활동이다. 소비가 줄어든 요즘에 상업용 광고는 회사 이미지나 매상과 직접 연관된 까닭에 회사의 흥망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신문과 잡지에서 온갖 형태의 광고가 넘쳐나 이를 접하는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십상인 판에 초연하게 일간지에 ‘페이터의 산문(散文)’을 전면광고하는 광고주의 참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물보다 ‘몸에 보탬이 되는 물’이 필요한 시대에, 난무하는 눈요기감 광고보다는 마음을 정제시키는 명문장 한 편이 더 맛있고 건강한 물 같다는 뜻으로 새기면 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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