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주말 오후에 운동을 다녀온 뒤 잠시 쉴 겸해서 TV를 켰다. 어느 채널에서 무엇을 하는가 싶어 돌리다보면 광고나 시간 때우기 잡담이 나오는 화면도 꽤 있어 채널이 자꾸 올라가기 마련인데, 계속 채널을 돌리다보니 70번대에서 중국방송 3개가 연거푸 나온다. 과거에 중국드라마 중 안개비 연가, 심정밀마, 나비지애 등 청춘남녀 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재미있었고, 거상 치아오쯔융, 백씨 가문의 여인들 등 상인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았다.

이에 못지않게 중국 사극도 좋은 내용의 명작들이 많다. 필자의 뇌리 속에 아직 잊히지 않는 드라마는 정관의 치, 황실의 형제, 대진제국, 대명왕조 15676 등이다. 이 같은 중국 사극들은 중국 내에서 방영될 때 엄청난 호평을 받은 작품들이었고, 국내에서 전파를 탈 때도 시청자들의 평이 좋았다. 그 작품들을 본 필자 또한 작품성뿐만 아니라 교훈적 내용에 공감이 가는 터여서 그 후 시간이 날 적마다 중국드라마를 찾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것이다.

지금 중화TV에서 중국 춘추시기 진나라의 이야기로 꾸며진 ‘조씨고아(趙氏孤兒)’가 방영중이다. 중국 원나라 때 작가 기군상(紀君祥)이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사극은 두아원(竇娥寃), 장생전(長生殿), 도화선(桃花扇)과 함께 중국 고전의 4대 비극 중 하나다. 조씨고아는 고전적 주제인 충성, 의리, 가족애 등을 이야기하면서도 ‘어떻게 정의를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주고 있는 바, 정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아직은 드라마 총 45회 중 29편이 방영되는 중반부다. 내용들이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간신이라고 알려진 재상 도안고가 그의 외아들 도안무강에게 치세의 방법과 방책을 알려주는 장면이 눈에 띈다. 도안고는 역모를 꿈꾸면서 반대파들을 하나둘 몰아내고 진경공을 무력화시킨 상태에서 장래에 대비해 열 살 난 그의 아들에게 제왕 수업을 가르친다. 그 대목에서 도안무강이 왕도(王道)를 공부하는데 치세의 명문(名文)이 등장하게 된다.

도안무강이 혼자서 ‘백성은 근심과 노고를 꺼리니 그들을 편안케 해주고, 백성은 가난을 싫어하니 부유하게 해줘야 한다. 백성은 위험을 싫어하니 안전하게 지켜줘야 하고, 백성은 대를 잇기 바라니 번성하게 해줘야 한다’고 크게 외운다. 아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도안고는 아들에게 다가가서는 그에 이르는 방법과 책략을 직접 공부시켜준다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며 아들이 익힌 제왕 수업을 슬며시 시험해본다.

도안고가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이라고 묻자 아들은 큰 소리로 답하기를 “민심에 순응하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한다. 다시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은?”이라고 질문하자 도안무강은 주저하지 않고 “민심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정말 똑부러지는 답이다. 열 살 난 어린아이에게서 나올 현답은 아닐진대, 그 내용은 세상과 백성을 다스리는 치세의 전략이라기보다는 군주나 정치지도자이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기본적 내용들인 것이다.

도안무강은 치세(治世)의 근본을 말하기를 “내가 백성을 편안(便安)케 하면 백성은 노고를 감내하고, 백성을 부유(富裕)케 하면 백성도 가난을 이겨내고, 백성을 안정(安定)시키면 백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을 번성(繁盛)케 하면 백성은 날 위해 희생한다.” 비록 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이고, 왕조시대 때의 까마득한 옛이야기라 현실성이 떨어질지는 몰라도 시대를 달리해서 이것은 오늘날 정부와 정치적 지도자들이 해야 할 기본으로서도 훌륭한 덕목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리 현실에서는 위민(爲民)한다는 정치가 오히려 국민에게 불신 받음을 부정할 수 없다. 민심에 순응하는 정치의 기본과 정치인의 도리는 민심을 거슬러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건만 정치권은 구태의연하다. 박근혜정부에서 ‘국민행복’을 내세우고 ‘국민안전’을 강조하고 있지만 자살률이 OECD국가 중에서 단연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고,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칠까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모습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다.

하지만 해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루빨리 적폐를 허물고 혁신하는 일이다.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이 사심을 버리고서 국민의 근심과 노고를 없애 편안하게 해주는 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해 모든 국민이 인간답게 살게 하는 일, 각종 위험한 요소를 없애 국민안전을 보장해주는 일, 청춘남녀들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에 솔선수범해준다면 극중 도안무강의 말처럼 백성도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희생하게 될 터, 그것이 바로 중국의 역사 드라마 ‘조씨고아’를 보고서 열 살 난 아이에게서 배운 세상일의 근본인 바, 차마 부끄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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