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올봄인가 대구에 들렀을 때 그곳에 사는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시골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그 친구는 중학교 2학년 때 짝꿍이기도 했다. 그는 매사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지라 전국 친구 모임이 열릴 때는 열일을 제처 놓고 참석해 분위기를 띄우는 게 장기였는데, 초등학교 교사직에서 정년퇴직한 요즘도 정례적으로 탁구, 하모니카 연주 등 취미생활을 하면서 건강하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좋은 친구다.

점심시간에 만난 우리는 식사 반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학교 다닐 때 추억 등을 이야기했다. 중년시절에는 서울과 대구에 떨어져 서로가 바삐 살았다보니 자세한 사정을 몰랐으니 세월에 묻혀버린 궁금한 점을 묻고, 또 그 친구가 근무했던 여수의 섬마을 학교를 화제에 올려놓고 정담을 나누었다. 친구는 섬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유용하게 알려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중학교 때 어느 선생님에게 배운 ‘별명 붙여주기’였다고 한다.

새 학기를 맞으면 반 학생들의 특징과 행동을 잘 살펴본 후 그에 맞는 별명을 하나씩 붙여주었다고 한다. 아이의 신체적 특징은 가급적 제외하고 잘하는 일과 진취적인 면 등 장점을 최대한 살려 별명을 붙여주고 불러주니 아이들과 친근하게 되고, 또 아이들이 잘 따라줘서 학습 효과도 높았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어쩌다 연락되는 제자들이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말하면 그 학생의 인상이 뚜렷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다른 한 가지는 내게 배운 ‘숫자 암호’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필자는 한글 자음과 모음에 아라비아 숫자를 부여한 암호문을 직접 만들어 재밌게 사용했다. 자음 ㄱ(기역)은 1, ㄴ은 2, 순서로 하여 마지막 ㅎ은 14이고, 모음은 ‘ㅏ’는 1, ‘ㅑ’는 2 순으로 마지막 ‘ㅣ’는 10이다. 자음과 구별하기 위해 모음은 작게 쓰고 그 숫자머리 위에 점을 찍는 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사랑’이란 글자는 ‘71(1숫자 위에 점) 41(1숫자 위에 점)8’로 암호화했던 것이다.

친구가 담임을 맡고 있는 2학년 학생들에게 숫자 암호를 가르쳐주고 암호로 일기쓰기 숙제를 내니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잘 해오더라는 말도 들려주었다. 필자가 중학교 2학년 때 호기심에서 만든 숫자 암호를 친구에게 맨 먼저 알려주었는데, 그 친구가 그 암호를 완전히 익혀 교사시절에 반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어 유용성이 컸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기뻤다. 그 자리에서 테스트해볼 요량으로 친구 이름 숫자 암호 ‘572 848 18’ 하니 그는 ‘문영규’라 응대했다.

시방도 필자는 숫자 암호를 사용해보면 기분이 흐뭇하다. 까닭은 직접 만든 그 내용을 알아주는 친구가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남들이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통해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제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9514 892 10102 17 82’라 불러주니 그는 ‘좋은 친구야’라고 풀이해 들려준다. 무슨 접선 신호 같기도 하지만 이 숫자 암호를 가끔씩 사용하는 것은 뇌운동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재 우리나라 치매인구는 61만 명으로 노인 4명 중 1명이 치매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환자는 물론 환자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더 걱정인 것은 빠르게 진전되는 고령화로 치매 환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치매는 비단 당사자인 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걱정해야 하는 병인데, 발병 초기에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면서 뇌를 운동시키는 ‘인지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전문가는 말하고 있다.

그런 참인데, 10월 11일 자 모 신문 2면에 난 ‘두근두근(頭筋頭筋) 뇌운동법’이라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조선일보와 중앙치매센터가 공동 개발한 프로그램 다섯 번째 순서인 ‘암호로 바꿔 쓰기’ 연재물이다. 그 내용은 필자가 50년 전에 재미로 만든 한글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아라비아 숫자를 부여한 암호와 유사했는데, 다른 것이 있다면 모음에는 영어 알파벳을 사용했고, 복자음과 복모음에 대해 번호가 부여된 표준변환표가 있으니 더 복잡하다고나 할까.

소개된 예문을 보면 ‘볼트 빼먹은 터널’ 암호는 ‘06E04 12I 17K 05C01 08I02 12C 02C04’인데, 참고로 필자의 숫자 암호로는 ‘654 129 66110 531 892 133 234(모음 점 생략)’이다.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주어진 규칙에 따라 기호로 바꾸는 과정에서 사람의 집중력, 작업 기억, 정신운동 속도를 향상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어쨌든 암호 풀이는 뇌 운동을 통한 인지(認知)훈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연이거나 또는 우연찮게 신문에서 ‘암호 놀이’를 접한 필자는 50년 전에 재미삼아 만들어본 ‘숫자 암호’의 유용성을 다시금 알았으니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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