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위원 시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시대 세종 27년(1445)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왕명을 받아 지은 악장이다. 한글이 반포되기 1년 전에 지은 이 악장은 우리 한국문학사를 통틀어볼 때에도 고문으로서 귀중한 자료로 그 내용은 조선 건국 초기의 왕조의 창건을 찬양·합리화하고 있다. 왕가의 기틀을 튼튼히 지켜나가기 위해 자손들에게 잘못함이 없도록 바르게 미리 타일러서 주의하게 한 내용들이 전체 125장에 담겨져 있다.

그 4장에서 보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느니”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문장은 용비어천가 중에서도 가장 수작(秀作)으로 알려진다. 우리 국민 가운데 학창시절에 고문을 배우고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불휘 기픈 남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로 시작되는 원문을 아직도 외우거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새삼스럽게 서두에 고문(古文)을 들춤은 용비어천가가 주는 교훈의 통용성 때문이다. 그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현대사회에서도 일반인들이 받아들이는 대의(大義)적 이미지는 유지된다. 사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후 백성이 널리 사용하기 전에 실용성에서 문제가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순수한 훈민정음으로 만든 악장인데, 지금도 제2장의 ‘뿌리 깊은 나무’나 ‘샘이 깊은 물’의 정의는 우리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수호는 최대 명제다. 주권을 가진 국민의 호응에 따라 정부가 선택되니 어느 정부이든 간에 민본(民本)이라는 철칙 하에서 국정을 운영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국가의 틀이 튼실해야 하고, 동량재(棟樑材)가 적소에서 제 구실을 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정부는 더욱 매진해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역할을 다하면서 국민행복에 충실을 다져야 함인데, 불행히도 이 정부에선 그런 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지 1년 3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정부 불신은 가중되고 국민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어떠한 사유가 있기에 나무가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고 꽃이 떨어지며 열매가 적은지, 무슨 문제점이 있기에 물이 깊은 샘을 만들지 못해 가뭄을 심하고 냇물이 마르고 있는지 그 내력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소통해 국민 눈높이에 맞추어 첫 단추부터 잘 꿰었더라면 지금쯤 국민은 태평가는 아니더라도 콧노래 정도는 불렀을 터인데 말이다.

굳이 복기(復棋)를 하자면,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제대로 되지 않은 인사 탓이라 해두자. 이 정부에 들어와서 출범초기를 포함해 지난해까지 낙마한 고위공직자와 공직후보자들이 10명이나 된다. 과거 정부에서 없는 일은 아니지만 월등히 심했다. 또한 정부기관의 낙하산 인사를 근절하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친박들이 대거 득세를 했으니 소위 관피아(관료+마피아)의 적폐(積弊)가 여전한 편이다.

그런 마당에 정부의 국민안전대책에 구멍을 보인 세월호 사고가 터져 국민은 마음앓이가 큰데, 설상가상으로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장성요양병원 화재 등으로 귀중한 인명피해가 발생해 어안이 벙벙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 대통령이 정부 쇄신과 관피아 척결에 최적임자로 여겨 국무총리로 지명한 안대희 후보자마저 자신의 변호사 수임료 문제 등 여론의 쓰나미를 감당하지 못해 전격 사퇴해버렸으니 이 역시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과 언론, 국민 여론에서는 이 모두가 청와대의 인사검증 시스템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야당에서는 문제가 되는 핵심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목하고 있다. 비서실장은 청와대인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정부 인사를 추천하는 기능을 가지는 바, 공교롭게도 현직이나 하반기에 구성될 국가 의전 서열 2위부터 4위까지가 모두 그와 같은 PK 출신인데, 서열 4위인 국무총리에 지명됐던 안대희 전 대법관 역시 PK였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과거사를 덮어버리자는 말이 아니라 지나온 잘못들을 교훈삼아 개과천선(改過遷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돌이켜보면 대통령의 인사 실패라느니 들리는 말들은 다 잘못된 나래짓 때문이다. 날개라는 비상(飛翔)적 수단이 없었다면 턱 없이 오르지는 못했건만 부실한 ‘인사 검증’으로 부상(浮上)했다가 민심의 잣대에 걸려 줄줄이 추락하고 말았으니 사필귀정인 셈이다. 국가·사회·가정의 기틀을 튼튼히 지켜나가기 위한 용비어천가의 훈계, 너무나 평범한 순리인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로 만듦이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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