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논설위원, 시인)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공터에 빽빽한 나무들이 가벼운 잎조차 미동 없이 한가로이 서있다.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 지방선거일을 불과 10일 앞두고서 예전 이맘때 같았으면 유세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로고송이나 가두연설로 시끄러웠을 터인데, 그런 현상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외출하면서 동네에서 선거벽보나 플레카드라도 보지 못했다면 4년 만에 치러지는 지방선거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모든 게 조용한 시기다.

푸름이 더해가는 신록의 계절인 지금은 활동하기가 딱 좋은 철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활기가 묻어나야 하건만 일상에서 갖는 모든 게 정지된 느낌이 드니 무기력해지고, 하는 일들은 흥이 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TV를 켜면 지방선거 여야 후보자의 여론조사나 꽁꽁 숨어버린 유병언 수색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매달 꼬박 시청료를 받아 챙기는 공영방송에서는 시청자를 우롱하는 부실한 편성, 보도에 과연 시청료를 내야 할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현실이다.

또, 신문이라도 볼 양 치면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들이 마뜩하지가 않다.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정부와 사회, 우리의 이웃이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됐을까 새삼스럽게 화두를 던져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따위의 신통하지 못한 답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어느 개인이 답답함과 분노로 마음 들끓는다 해도 혼자만의 공허한 독백일 뿐이다. 국민이 화합해 변신해야 할 정부를 옥죄지 않는다면 국가·사회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국민은 많은 것을 잃었고 또한 알았다. 이 땅의 미래세대인 꽃다운 젊은 학생들을 잃었고, 정부가 국민안전을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평소 믿음이 허구임을 알았다. 정부가 만든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4조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지고,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를 예방하고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며…”라는 ‘국가 등의 책무’가 한낱 드러내 보이기 위한 관상용(觀象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국민불신이 뼈에 사무칠 만하다.

하여,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로 참사 대국민담화에서 책임을 뼈저리게 느낀다며 국가개조를 발표했고, 공직사회의 변혁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밝힌 국정개혁 27개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속전속결로 나가 정부조직법·공직자윤리법 개정안 국회 제출, 진상조사위를 포함한 특별법 제정, 퇴직공직자 취업제한 강화 등 14건의 후속조치 과제를 6월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나머지 후속조치도 모두 연내 마무리하기로 하는 등 분발하고 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동안 정부가 주창해온 ‘국민안전’은 허상이었다. 억울한 희생과 호된 아픔,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한 이번 참사를 계기로 이제는 정부가 반성하고 정신 바짝 차렸을 것이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공직조직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정부 존재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근혜정부가 밝힌 국가개조는 정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사회변혁을 위해 먼저 공적부분이 혁신돼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안대희 전 대법관을 내정했다. 공직사회를 개혁하고, 사회분위기를 쇄신해야 할 시기에 그동안 법조인으로서 정도를 걸으며 바른말을 해온 전력이 발탁배경으로 보인다. 안 내정자도 “제게 국무총리의 역할을 맡기는 이유는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적폐를 일소하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비정상적인 관행을 버리고 공직사회를 혁신해 국가와 사회의 기본을 바로세우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는데 총리 적임자로 든든한 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있다. 국민화합이 무엇보다 시급한 마당에 이를 고려치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안 내정자가 검찰 출신이고 PK 출신인 점을 들어 인사에서 보이는 사회적형평성 문제가 있다. 가뜩이나 대한민국 국가 의전(儀典) 서열 1위부터가 5위까지가 영남권인데, 대통령을 제외한 차기 국회의장 내정자,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과 총리 내정자마저 PK 출신이라, 한 지역이 국가권력을 장악한다는 사실에 부정적 요소가 따른다.

인사는 만사(萬事)다. 특히 정부가 불신을 받고 사회가 기득권으로 인해 공평하지 못할 때에는 국민의 힘을 빌려야 하고, 국민화합이 중요하다. 그 매개는 정부 권력에 대한 지역적 인사 균형 배분이나 균형발전이다. 하지만 한 권역에서 대한민국 권력을 대표하는 수장(首長)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현실은 그 지역의 인물들이 아주 뛰어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역시 ‘끼리끼리’ 풍토 조장으로 폐단이 우려된다. 혹여 야당에서 주장하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PK 출신이어서 그 입김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의 눈초리가 큰데,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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