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현배옛날 폴란드의 포비실레 지방을는 흐르는 비스와 강에 인어들이 살고 있었다. 인어는 허리 위는 사람이고 허리 아래는 물고기인데, 해가 뜨면 수면 위로 올라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온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강바람을 타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크 강까지 울려 퍼졌다.날이 저물면 인어들은 노래를 그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인어는 보름달이 뜨면 홀로 남아 밤새도록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그 인어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맑았다. 귀를 기울이면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종달새 울음소리 같기도 했
글 신현배옛날 어느 인디언 부족 마을에 부모님을 여읜 고아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형제자매도 없고 친척도 없었다. 하지만 부족 사람들은 소년에게 먹을 것을 주고 정성스레 돌봐 주었다. 특히 인디언 남자들은 사냥을 떠날 때 언제나 소년을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소년은 훌륭한 사냥꾼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그는 부족 사람들에게 ‘스카페이스’라고 불리었다. 스카페이스는 인디언 말로 ‘흉터 난 얼굴’이란 뜻이다. 그는 커다란 회색곰을 물리친 적이 있는데, 그때 얼굴에 상처를 입어 그것이 흉터로 남았다. 젊은이는 얼굴의 흉터를 처음에는 대수롭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고종은 슬픈 왕이다. 1907년 7월 19일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보통은 사후에 후계자가 대를 잇는데, 살아있을 때 권좌에서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굴욕이었다. 아들 순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물려받았으나, 이미 다 망하고 실권도 없는 권좌였다. 그마저도 3년 후 병합으로 왕조의 명맥은 영원히 끊어지고 말았다. 500년 대대로 지켜온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세종대왕과 거북선 등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유학생활강윤은 공주 만세시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석방되자 건축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영명학교 윌리엄스 교장의 권고와 추천으로 택하게 된 길이었다. 강윤은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호(琵琶湖)의 동쪽 연안에 있는 상업도시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 도착하여 보리스 선교사와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보리스 건축설계 사무소에서 밑바닥부터 실무를 배우고 저녁에는 두부나 떡을 팔아 학비를 벌었다. 그는 조선인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일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강윤(姜沇)은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柳愚錫, 이명 준석, 관옥)과 공주영명학교 동급생이며 1919년 4월 1일 공주 읍내의 만세시위 때 유우석과 함께 주도자로 참여하여 대통령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출생과 성장강윤(姜沇)은 1899년 4월 28일 충남 논산군 양촌면(陽村面) 인천리(仁川里)에서 부친 강창석(姜昌錫)과 모친 김말자(金末子)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크고 눈썹이 진하며 귓바퀴가 유난히 컸고, 어릴 때부터 영리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1913년 11월 5일 진도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에 있었던 1년간 제자가 생겼다. 신문명과 신지식에 목마른 청년이었다. 손정도는 제자가 된 19살 허도종(許道宗)을 데리고 평양행 길을 떠났다. 도중에 서울에 들러 청년을 배재학당에 입학시켰다. 허도종은 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평양 집에 도착했다. 1년 6개월 만이다. 부인은 손정도를 몰라봤다. 고문으로 몸과 얼굴이 몰라보게 상하여 있었던 거다. 그해 겨울 가족과 지내며 몸을 추슬렀다. 이듬해 19
글, 사진 서상진 세계잡지연구소장은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조총련계가 일본어로 만든 종합잡지이다. 그간 여러 이유로 우리나라 잡지사에서 빠져 왔기에 이번에 소개하고자 한다.필자가 소장한 잡지는 1946년 창간호부터 1949년 9월 통권 31호까지 9권이다. 최종적으로 몇 호까지 나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 당시로는 드물게 31호까지 간행된 것으로 보아 꽤 장수한 잡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창간은 1946년 4월 1일인데 창간호에서 특징적인 것을 보자면 문단의 괴짜 시인 을파소 김종한의 유고시 외 1편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열렬한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1931년 2월 19일 오후 12시 중국 길림성 시내 동양병원에서 손정도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손정도는 목사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임시정부의 통합자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정자였다. 그는 북한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추앙하고 흠모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장남은 손원일인데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손정도의 52년 생애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간도참변 홍범도가 독립군 봉오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일본군부는 그 한 달 전부터 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을 ‘청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간도 한인들은 독립군 무장투쟁을 강화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자 이 계획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 협력과 일본군의 진입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고된 노동과 준비의 시간(1911~1918)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분위기가 일변했다. 홍범도 같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당국의 감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이 일본을 자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911년 홍범도를 비롯한 이상설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빼고, 생업을 장려한다는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러시아 당국의 압박 때문에 취한 고육책이었다. 홍범도도 ‘권업’에 나섰다. 1912년 가을, 동지들과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해방과 해외동포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본 히로히토 천왕의 항복 성명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해외에는 약 500만 이상의 한국민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220만, 만주를 포함한 중국 전역에 250만, 기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 일제의 강제동원이나 취업 또는 사업을 위하여 해외에 나갔던 사람들이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으로 돌아가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으나 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더구나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에 휩싸였고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해녀들의 항일운동 3.1운동 후 일제는 무단통치를 철회하고 조금 완화된 문화정치로 후퇴했다 하더라도 사찰과 통제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찰력을 증강하여 더욱 주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 때문에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합법공간의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부분의 운동이 거의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이에 적색농민조합운동, 적색노동조합운동 등으로 사회주의적 조직화와 지하화를 통해 농민운동, 노동운동을 혁명화하고자 하였으나 큰 변화를 가져오지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공산당 재건운동과 고경흠, 강문석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은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국제적 승인이 취소되어 해방될 때까지 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 재건운동에서 제주도 출신의 고경흠(高景欽)이 크게 활약했다. 고경흠은 1927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동경에서 이북만(李北滿) 등과 ‘제3전선사(戰線社)’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잡지 을 발행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FF) 동경지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사회주의 운동 3.1운동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질식해 가던 독립정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젊은이들은 만주로, 상해로 달려가 독립군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었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기념하며 결의를 재다짐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그 제한된 자유의 틈새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민족 언론이 출범했고 국어·국사 등의 국학운동과
글 신현배 옛날 몽골의 어느 곳에 활을 잘 쏘는 형제가 살았다. 두 사람은 틈만 나면 활과 화살을 들고 사냥을 다녔다. 어느 날 아침, 형제는 사냥을 하러 산에 갔다가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산꼭대기에서 활과 화살을 든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형제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보아하니 사냥을 다니시는 분 같은데, 사냥은 안 하고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남자가 대답했다. “제가 조금 전에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를 활로 쏘아 맞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아 새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형제는 남자와 함께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제주도는 삼다도(三多島). 돌, 바람, 여자가 많다. 돌과 바람이 많아서 척박한 땅이다. 오죽 땅이 척박했으면, 여성들이 바다에서 물질하며 삶을 개척해야 했을까. 제주의 독립운동사도 돌, 바람, 여자의 키워드로 풀어볼 수 있다. 필자는 불과 14년쯤 전에 처음 제주도에 갔는데, 그때 조천의 제주돌문화공원에 가보고는 깜짝 놀랐다. 육지에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생활용구, 건축부재들에 돌을 사용하여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돌문화공원을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만해 한용운 한용운은 불교 승려이고, 불교개혁가,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었다. 그의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어릴 때 이름(아명)은 유천(裕天)이었다. 만해와 용운은 불교 이름인데 용운(龍雲)은 불교에 귀의한 제자들이 받는 불교 이름이며, 만해(卍海)는 승려의 아호이다. 그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던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동리 서당에서 공부했는데 고향 홍성은 조선 후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거인에 대한 기억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선생이 중국 땅 기강에서 71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1919.4.10~4.25)으로서 임시정부 출범의 산파역할을 했고, 그 후에도 제12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령과 주석 등 수반을 여러 차례 지냈다. 그와 오래 고락을 함께한 동지인 조완구는 그의 장례 후에 쓴 글(, 1940년 4월)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선생
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중일전쟁의 전세는 점점 중국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한커우와 광저우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는데 일제의 세력이 남하해 옴에 따라 궤이린(桂林)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수세에 몰린 중국 국민당은 중국 내 한인 독립운동 세력을 중국의 항일전에 동원하고자 나섰다. 1938년 11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위원장이 김구를, 1939년 1월 6일에는 궤이린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의용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