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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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통합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 9. 17). 앞줄 중앙에 안창호, 다음 줄 맨 오른쪽이 김구 선생이다. ⓒ천지일보 2023.01.18

공산당 재건운동과 고경흠, 강문석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은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국제적 승인이 취소되어 해방될 때까지 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 재건운동에서 제주도 출신의 고경흠(高景欽)이 크게 활약했다. 고경흠은 1927년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동경에서 이북만(李北滿) 등과 ‘제3전선사(戰線社)’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잡지 <제3전선>을 발행했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FF) 동경지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29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가 가입하여 일본총국 출판위원이 되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검거되자 일본으로 호송도중 고배(神戶)역에서 탈주하여 상해로 갔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5)

당시 상해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운동을 주도했던 한위건(韓偉健)이 있었다. 한위건은 1930년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국내 영등포와 일본에 공작원을 파견했다. 그때 일본으로 파견된 공작원이 제주 출신의 고경흠이었다. 고경흠은 이듬해 다시 영등포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을 조직한 후 다시 일본으로 잠입하여 집필활동을 했다. 

동경대에 재학하면서 좌악문필가들의 출판사 무산자사(無産者社)를 운영했던 김삼규(金三奎)는 이 시기 고경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고경흠은 이론파로서 김민우, 차석동 등의 필명으로 몇 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고경흠 등은 조선공산당 재건에 관한 출판 활동을 ‘무산자사’(無産者社)를 통하여 하고 싶다고 위원장이었던 나에게 요구했다. 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김삼규, 「개인사 중의 조선과 일본」, 『(朝日選書) 朝鮮と日本のぁぃだ』, 1980. p, 24.)

고경흠은 1931년 8월에 동경에서 김삼규·한재석·활학노 등과 같이 검거되었다. 그 후 고경흠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제주 출신 강문석도 크게 활약했다. 그는 1932년 상해에서 박헌영 등과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하고 그 후 국내에서도 박헌영과 함께 공산당 재건을 위해 경성 콤그룹에서 활동했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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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재일동포 밀집 지역이었던 히라노강변. 벌목된 나무들이 가득하다. 이 하천변에 1960년대까지 제재소가 많았다. ⓒ천지일보 2023.01.18

제주도인의 일본 도항과 사회주의 직수입 
사회주의 수용이 본격화되던 시기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그것은 제주도가 사회주의 수용의 직항로 개설을 의미하기도 하고 육지에 비해 더욱 진보적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 중 일본은 전시 특수경기를 톡톡히 누렸다. 개항 이래 계속되어 온 만성 적자국 상황을 대전 기간 중에 흑자국으로 도약했다. 전례 없는 호황으로 인력 수요가 급증했다. 값싼 조선인 노동력이 환영받았다. 1922년 12월 일제는 한국과 일본 간에 자유 도항제를 실시하고 1923년 12월 15일 제주-오사카 간의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이전에 제주도에서 부산, 시모노세키(下關)를 경유하여 오사카로 가는 경우보다 시간은 절반, 배삯은 1/3로 절감되었다. 

그 결과 일자리를 구하고자 일본으로 도항하는 제주인이 급증했다. 그리하여 1923년 제주 총인구가 20만 9925명, 1930년에는 19만 9577명이었는데, 일본에 잔류하는 제주인의 수는 1926년 2만 8144명, 1934년에는 5만 45명으로 증가하였다. 제주 인구의 4명 중 1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셈이었다. 일본으로 진출한 제주인들은 제주-오사카 정기노선의 종착지인 오사카에 집단 거주했다. 오사카부의 조선인 남자 1000명 중 60% 이상이 제주 출신이었다. (조선총독부, 「阪神, 京浜 지방의 조선인 노동자」, 1924, 7)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은 오사카의 최하층 노동자가 되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우산 제조공장, 메리야스공장, 유리공장, 고무공장, 철공장 등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혹사당했다. 

제주도 내에서는 소작쟁의나 노동쟁의가 거의 없었으나 제주인들의 계급적 자각에 입각한 노동운동은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한 제주항일운동사의 서술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에 재인 한국인의 3재 직종은 갱부(坑夫)ㆍ토공(土工)ㆍ직공(職工)이다. 그들은 민족적 차별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일본인으로부터 소외된 생활환경 속에서 신음했다. 따라서 재일 한국인 속의 선각적인 인텔리들은 그들에 대한 민족적 박해를 반대하고 차별적인 노동조건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당연히 그를 위한 사상적 무기는 사회주의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오사카에 있는 제주도민들의 노동운동은 조천 출신의 김문준(金文準, 1893~1936)이 주도했다. 김문준은 제주도에서 교원생활을 하면서 1927년 오사카에 와서 노동조합 간부로서 고무공장 파업투쟁, 판제(阪濟: 오사카-제주)항로의 선임인하운동을 지도하였다. 

1930년 전후하여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一國一黨) 원칙에 의하여 재일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 공산당에 흡수되고, 1925년 2월에 결성된 재일본조선노총동맹(재일조선노총)도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에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 대판 조선노동조합도전협 산하 산업별 노동조합(화학노조, 금속노조 등)에 흡수되었다. 김문준은 1930년에 전협화학노조 대판지부의 책임자로서 고무공장 파업투쟁을 지도하다 검거되었다. 김문준은 그 후 1934년부터 일본 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고 1935년에는 민중일보를 창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1936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9)

이 화학노조에 강항인(姜恒仁, 姜鐵), 김석송(金石松) 등 제주도 출신 간부들이 많았다. 현상호(玄尙好, 송성철(宋性徹) 등도 유명한 제주도 출신 활동가였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8)

현호경(玄好景)은 제주 성산포 출신인데 일본공산당 관서지방위원이며 대판시위원회 책임자였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포함한 대판 공산당의 최고 간부였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9) 그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후 일본의 좌익탄압이 강력하게 계속되면서 1933년 240명의 공산당원, 152명의 공청원을 포함하여 1820명의 재인한국인이 검거될 때 체포되었다. 

오사카 한국인 노동자 중 제주도 출신이 60% 이상 차지하고, 한국인의 노동운동에서 제주 출신 인사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시기에 오사카와 제주 간 직항로는 일본의 사회주의 사상운동과 노동운동이 제주도로 직수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대판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노동운동에서제주도 출신자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는 동아통운조합의 자주운동운동 시기와 겹칠 뿐만 아니라 1932년초의 제주도 해녀항쟁시기와도 연결된다. 제주도와 대판을 직결하는 판제항로다 두 개 재역간을 사상적 및 조직적으로 연걸하는 파이프의 역할을 수항한 것은 안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 점은 제주도가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일본과 인적, 교통적으로 직통으로 연결되어 육지보다 결코 뒤쳐진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시기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선구자인 김명식은 1929년 2월에 오사카로 가족을 이끌고 왔는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별건곤> 제24호(1929. 12)에 별건곤 오사카 지사 김용암(金龍岩)이 그를 방문한 기사가 있다.

新生活社의 筆禍事件이후 濟州本第에서 병을 치료하고 게시든 金明植氏가 大阪으로 와서 게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바로 얼마 전 일이다. 나는 깃부고 반가운 마음으로 선생을 차저 猪飼野町(이카이노마치(猪飼野町)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동성구와 생야구에 걸친 이전에 평야천 구도로 우측편 일대 지역으로 제주도인의 제2의 고향이라 불린다.)으로 갓다. 선생은 나를 반기며 마저드러 따뜻한 악수를 하여 주섯다. 京城의 천지가 좁다는 듯이 濶濶大路에서 左馳右走하며 빗나게 활동하시든 선생이 異域의 이 땅에 와서 悶悶한 세월을 보내게 되니 보는 사람이 엇지 感慨之懷가 업스랴. 선생의 宅이 잇는 곳은 우에도 말하엿거니와 猪飼野町이다. 大阪에서도 가장 공기가 불결하고 지저분한 곳이다. 그러한 곳에서 선생이 셋집으로 어더 들은 집이니까 집꼴이 엇더하다는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업슬 것이다. 선생의 얼골은 말할 수 업시 파리하엿다. 足部手術도 아직 하지 못하고 더구나 耳鳴症이 심하여 말을 잘 알어듯지 못하실 뿐아니라 장시간의 담화는 도저히 불가능하신 모양이다. (金龍岩, 「前날 新生活社主幹 金明植氏 訪問記 在外名士訪問記」,  『별건곤』 24, 192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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