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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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규모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모습. ⓒ천지일보 2023.01.18

사회주의 운동
3.1운동은 거대한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인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질식해 가던 독립정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젊은이들은 만주로, 상해로 달려가 독립군과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독립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었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기념하며 결의를 재다짐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그 제한된 자유의 틈새에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민족 언론이 출범했고 국어·국사 등의 국학운동과 문학·언론·출판 등의 문화운동, 노동·농민·청년·여성·어린이·형평사 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일제의 민족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자기 정체성 찾기 작업이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각지 임시정부 통합의 성공은 전제주의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 시대로의 전환을 선포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모든 성과와 의미의 바탕에 독립을 성취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희망과 기대가 있었다. 

3.1운동이 가진 많은 성과와 의의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독립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3.1운동은 결과적으로 좌절이었다. 그 좌절감. 좌절감에 뒤따르는 무력감은 더 은밀하고 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더 강력한 독립운동 길을 모색하게 했다. 바로 그 시기에 독립운동의 방편으로서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본래 사회주의는 사회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 농민 등 무산자로 구분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이며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노동의 과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가를 타도하여 노동자 농민의 무산자(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농민의 사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초기 사회주의 사상은 지식인들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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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의 김명식 ⓒ천지일보 2023.01.18

김명식과 사회주의 수용
이러한 초기 사회주의운동에서도 제주도 출신들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런 선구적 인물로서 제주 출신의 김명식(金明植, 1892~1943)이 있었다. 그는 와세다대 정치경제과를 나와 사회주의에 대해 대학에서 정식으로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궤적은 3.1운동 이후 청년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민족운동의 영역이 확대되어가다 사회주의운동으로 나아가는 한국민족운동의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그의 활동을 공훈록을 통해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 김명식(金明植, 1892~1943)
- 제주(濟州) 사람이다.
- 일본 동경의 조도전(早稻田) 대학 정치과 유학 중 1912년 10월 27일 조직된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의 간사부장·회장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의 주도자로 참가하였다.
- 2.8독립선언 이후 귀국한 김명식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당시 노동운동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노동운동에 앞장을 섰다. 아울러 1920년 6월 28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이어 12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창립될 때 그는 지방부의 일원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식민지 민족문제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신생활사(新生活社) 설립에 참가하여 주필 기자로 활동하였다. <신생활>은 1922년 3월 11일 창간된 사회주의 계열의 최초의 대중 잡지로 무산대중의 개조와 혁신에 목적을 두고 발행되었다. <신생활>은 창간호가 나오자마자 발매금지되었는데 1922년 11월 14일자 특집의 <노국(露國)혁명 5주년기념호>가 다시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가 되었다. 이때 ‘러시아혁명기념’이란 논문을 기재한 김명식도 체포되어 1923년 1월 8일,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문후유증으로 1924년 7월 26일 형집행정지(刑執行停止)되었으나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 그는 1927년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제주지회장(濟州支會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29년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검거되었다. 그 결과 그는 1930년 6월 7일 대판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이후에는 잡지 <비판>에 「조선종교론」·「민족단체 재건계획에 대하여」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 2000.) 
- 공훈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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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록 ⓒ천지일보 2023.01.18

김명식의 기고 기사가 문제가 된 신생활지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관련 사건으로서는 최초로 사법사건이었다. 그는 복역 중 신병으로 가석방된 후에도 신간회 제주지회장, 오사카에서 노동운동 등의 활동을 하다 다시 투옥되는 등(「김명식씨 출옥」, 『삼천리』 11, 1931. 1월호, p. 37. “신생활 사건의 金明植씨 최근 대판 형무소에서 잔기(殘期)를 다 마치고 최근에 출옥한 바 좌기처에 체류 중. 대판 동성구(東成區) 저사야(猪飼野) 1203번지”) 고난을 겪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3년 서거했다. 

1920년대 육지에서 노동쟁의나 소작쟁의가 활발했을 때 제주도에서는 그와 같은 노동쟁의나 소작쟁의가 별로 없고 주로 사회주의적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직된 ‘반역자구락부’, 그것이 발전된 1925년의 ‘신인회(新人會)’, 1925년 9월에 결성된 제주청년연합회, 1927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한 좌우합작의 신간회가 모두 그러했다고 평가된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4)

 제주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중심인물들은 신인회 창립멤버들인 강창보(姜昌輔, 용담), 김정노(金正魯, 이도), 오대진(吳大進, 모슬포), 윤석원(尹錫沅, 성내), 김시용(金時容, 조천) 고경흠(高敬欽, 조천), 김택수(金澤銖), 송종현(宋種鉉), 김민화(金民化) 등이다. (「민족해방 때까지의 투쟁」, 위, 『제주도지』 1(제7장 제2절 3))  

1920년 말을 지나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화한다. 곧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시총동원체제로 전환한다. 1920년대 말에는 합법 공간에서의 운동은 민족주의운동이든 사회주의운동이든 불가능해졌다. 이리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은 탄압·억압되고 사회주의 운동은 지하화 한다.  제주도 사회주의 운동 또한 1928년 7월을 전후하여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김택수, 송종현, 강창보와 공산단청원회 김정노, 윤석원 등이 구금되면서 신인회 급진분자가 공산당 조직과 직접 연결하여 비합법적 지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위  『濟州抗日獨立運動史』, p. 54)


* 돌, 바람, 여자의 섬 제주도의 독립운동사 (2)-바람 (4)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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