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필자에겐 우리나라 가요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일제 강점기 1935년 10대 후반의 가수 이난영은 이 가요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되었다. 9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흘러간 가요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준다.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1990년대 광주 출신 친구들은 술을 한잔하면 이 노래를 불렀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겪은 이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노래 속에 나오는 영산강, 노적봉 그리고 유달산은 호남 출신이 아니라도 정겨운 이름이다.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월산면
상생(相生)이란 한자어 그대로 ‘서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이익을 취하고 서로가 발전됨을 뜻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희생(犧牲)을 강요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만약 광주 군사공항이 전남의 한 지자체로 이전해 광주시도 발전하고 이전 지자체도 더 나은 환경이 조성된다면 말 그대로 상생일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그 누가 군 공항 이전을 반대하겠는가? 하지만 과연 광주 군사공항을 받는 지자체도 함께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 없다.군 공항 인근 지역이 전투기 훈련에 따른 소음피해가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BC259년, 진(秦)이 상당을 평정한 후 군사를 나눠 왕흘(王屹)에게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의 동쪽 피뢰(皮牢)를, 사마경에게 태원(太原)을 공격하게 했다. 한(韓)과 조(趙)는 소대(蘇代)를 진의 범수(范睢)에게 파견했다. 소대(蘇代)가 범수에서 물었다.“무안군 백기(白起)가 마복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사로잡았습니까?” “그렇소.” “곧 한단을 포위하겠군요?” “그렇소.”“조가 망하면 진왕은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됩니다. 무안군은 70여개의 성을 탈취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 소공(
박종윤 소설가 진나라의 무력 침공을 두려워한 한(韓)과 조(趙)나라는 말재주가 뛰어난 유세객 소대에게 후한 뇌물을 들려 보냈다. 소대는 진나라 재상 응후를 만나 한과 조나라가 망할 경우 장군 백기와 응후 간에 조정의 실권을 잡는 데 득과 실을 따져 설득하기 시작하자 그의 말이 먹혀들었다. 응후의 노력으로 진나라와 한, 조나라 간의 화의가 성립되고, 진나라 왕은 모든 군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백기는 응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그해 9월 진나라는 오대부(상대부 벼슬) 왕릉을 장군으로 삼아 다시 조나라 수도
박종윤 소설가 조사의 아들 조괄이 조나라 장군에 임명되어 진나라에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 조괄의 어머니가 조왕을 찾아가 도저히 장군감으로서는 부족하니 그 명을 거두어 달라고 했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다”라고 왕이 말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식을 장군으로 삼으시려면 부탁이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어미를 꾸짖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왕은 그 부탁은 받아들였다. 그 뒤 조괄은 염파로부터 군대를 인수받자 즉시 군율을 모두 바꾸고 대폭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박종윤 소설가 백기는 미땅 출신으로 군사들을 부리는 데 뛰어나서 진나라의 소왕에게 발탁되었다. 소왕 13년(기원전 294) 백기는 좌서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신성을 공격했다. 다음 해에 백기는 좌경으로 승진하여 한, 위 연합군과 이궐에서 싸워 적군 24만 명을 베고 적장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으며 다섯 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는 그 공로로 국위로 승진했다.백기는 계속하여 황하를 건너 건하를 쳐서 땅을 빼앗고 그 다음 해에는 대량조로 승진했다. 그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함락한 성과 고을은 모두 61개에 이르렀다. 다음 해는 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