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필자에겐 우리나라 가요 중에서 가장 가슴에 와닿는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일제 강점기 1935년 10대 후반의 가수 이난영은 이 가요를 불러 일약 스타가 되었다. 9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흘러간 가요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준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1990년대 광주 출신 친구들은 술을 한잔하면 이 노래를 불렀다. 광주의 아픈 역사를 겪은 이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노래 속에 나오는 영산강, 노적봉 그리고 유달산은 호남 출신이 아니라도 정겨운 이름이다.

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용흥사계곡에서 발원, 광주와 나주시・함평군・영암군・무안군・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로 흐르는 138.75㎞나 되는 긴 강이다. 이 강 주변 비옥한 땅에는 마한 문화가 활짝 열려 숱한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마한 이후에는 가장 풍요로운 백제 문화가 영글었다.

유달산은 예로부터 개골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개골산은 금강산의 겨울 이름인데 아무래도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바위 뒤에 군량미를 쌓아 놓았다는 유적이 아닌가. 쌀 한 톨도 백성들에게 신세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장군은 군사들을 먹일 군량미를 지키는 데 신명을 바친 것 같다.

호남 친구들과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이 노래를 부르면 가슴이 찡했다. 친구들은 눈물을 뿌리고 나도 덩달아 설움이 벅찼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필자는 첫 소절보다 2절을 더 좋아한다.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삼백년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가 이해가 안 되었다. 알고 보니 ‘삼백년 원한 품은’ 가사가 일제의 검열에 걸리자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으로 개사했다고 한다.

작사가는 와세다 대학 출신의 무명 시인 문일석이었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 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 1등에 당선됨으로써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가요는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90년 가까운 연륜에도 불구하고 시공을 초월, ‘불후의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난영은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다. 해방 이후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어도 가수 남인수와의 사랑은 절망적이었다. 한때는 약물중독으로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생각했다고 한다. 1957년에는 동료 가수였던 고복수의 은퇴 공연이 있는 날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가수는 1절과 3절을 불렀는데, 3절에 와서는 그동안의 설움이 터지며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부른 노래는 최고의 절창으로 가요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요즈음 TV조선이 매주 목요일 방영하는 미스트롯 경연에서 두 젊은 여성 가수가 부른 목포의 눈물이 감동적인 인기를 모았다. 시청자들의 조회 수도 매우 높아 나이 든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음이 밝혀졌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목포의 눈물’은 명곡이 되었다. 지금도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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