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윤선영 기자]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지난 22일 신생아 특례대출 신청자 중 쌍둥이 출산 가구(김세곤씨, 만36세)를 초청해 HUG 대구경북지사에서 간담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이번 간담회는 지난 2022년 말 기준 합계출산율이 0.78명을 기록하는 저출산 상황에서 쌍둥이 출산을 축하하고 신생아 특례대출의 체감되는 혜택 등을 경청하고자 마련됐다.신생아 특례대출은 ‘저출산 극복을 위한 주거안정방안(2023.8.29.)’에 따라 출시한 상품이다. 대출신청일 기준 2년 내 출산한 무주택 가구에 대해 부부합산 연소득 1억 30
[천지일보 남원=김도은 기자] 전북 남원시가 예산 1억 7000만원을 들여 새로 제작한 춘향영정을 두고 논란이 식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몽룡도 못 알아볼 억지 춘향”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절개지킨 16세 미녀 성춘향’ 이미지(형상)에 대한 파괴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국악인들도 1일 남원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춘향 모습으로 문화재 춘향가를 부를 수 없다”며 “고귀한 춘향으로 다시 그려 봉안하라”고 성명을 냈다. 국악인들은 성명을 통해 “새 춘향 영정은 나이가 40~50대로 보이고 얼굴은 남장여자, 의복은 어우
‘대한제국 망국사’ 펴낸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천지일보=김예슬 기자]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는다면 치욕의 역사는 언제고, 어떤 형태로든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해 펜을 들었습니다.”과거 열강의 침탈무대가 됐던 한반도. 대한민국은 국력과 국격 상승으로 이제 국제사회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됐지만 격변하는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 외교·안보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이러한 때 거울과 경계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역사’다. 역사칼럼니스트인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은 우리의 역사 중에서도 ‘대한제국’을 들여다봤다.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과거 열강의 침탈무대가 됐던 한반도. 대한민국은 국력과 국격 상승으로 이제 국제사회에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됐다. 하지만 격변하는 불안한 국내외 정세 속에 외교·안보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이러한 중요한 시점에 ‘망국’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가 나왔다. 바로 역사칼럼니스트인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의 저서 ‘대한제국 망국사’다. 김세곤 원장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성찰에서 이 책을 펴냈다.‘대한제국은 왜 망했을까.’1897년 10월에 탄생한 대한제국은 일본과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계속된 전쟁은 한·중·일이 싸운 ‘동아시아판 세계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外侵) 없이 200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3일에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전쟁 초기엔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었지만, 이윽고 명나라가 참전해 국제전쟁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5월 하순에 충남 논산의 파평 윤씨 유적을 답사했다. 윤여갑 씨의 안내로 맨 먼저 간 곳은 종학당(宗學堂)이다. 종학당은 파평 윤씨 문중 서당으로 1627년에 인평대군 사부 윤순거(尹舜擧)가 세웠다.이어서 윤황 고택과 묘소를 찾았다. 대사간 윤황은 우계 성혼에게 배웠는데 성혼의 사위가 됐다. 그는 8형제(적출 5명, 서출 3명 속칭 팔거)를 낳았다. 창녕성씨 부인이 낳은 다섯 아들이 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이다.다음은 유봉영당(酉峰影堂)이다.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을까? 그것도 폭군 연산군 시절에. 그런 강직한 관리가 있다. 중종 때 청백리에 두 번이나 뽑힌 박상(1474∽1530)이다.전라도 나주에 소부리(牛夫理)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연산군의 애첩 숙화(淑華)의 아비였다. 그는 토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권력을 감히 손보지 못했다.1506년 5월 12일의 ‘연산군일기’에는 소부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전교하였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백성은 토지를 논밭으로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아전을 이렇게 혹평했다.그런데 청렴한 아전으로 이름을 남긴 이도 있다. 영조 때 호조서리(戶曹胥吏) 김수팽이 그렇다. 그는 기개가 뛰어나고 대장부다운 절조가 있었다.하루는 김수팽이 선혜청 서리인 동생 집에 들렀다. 그런데 마당에 항아리들이 줄지었고 검푸른 염료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이게 무엇인가?”김수팽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동생에게 물었다.“아내가 염색업(染色業)을 하고 있습니다.”아우는 공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강진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다. 이 길은 유학과 불교의 만남, 정약용(1762∼1836)과 혜장 선사(1772∼1811)가 걸었던 길이다.1800년 6월에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런데 그에게 거처를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부터 정약용은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사의재’라 했다.1805년 봄, 바깥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498년 7월 하순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7월 1일에 사화는 시작됐다. 이날 윤필상, 유자광 등이 연산군에게 비사(秘事)를 아뢰었고, 연산군은 김일손(1464∼1498)을 잡아 오라고 전교했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일).사관(史官) 김일손의 호는 탁영(濯纓)이다.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초나라 굴원(BC 343∼278)의 책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굴원은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를 했으나, 간신들의 참소로 호남성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전남 장성군 황룡면에는 청백리 박수량(1491~1554) 묘소가 있다. 묘 앞에는 글자 한 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있다.“그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碑)에다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累)가 될지도 모른다.”명종 임금은 청백리 박수량의 삶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백비를 하사했다.먼저 ‘명종실록’에 실린 박수량의 졸기를 읽어보자.“지중추부사 박수량이 죽었는데, 전교했다. ‘염근(廉謹)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매우 슬프다. 특별히 치부(致賻)하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퇴계 이황(1501∽1570)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1천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청백리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이황은 1551년(명종 6)에 청백리에 뽑혔다. 퇴계(退溪)는 항상 물러나고자 했다. 이황은 1545년 을사사화 이후 병약(病弱)을 구실삼아 관직을 사퇴했다. 1546년에 그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바위 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열중했다. 이때 실개천 토계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는 누구일까? 선조 때 이조판서를 한 이후백(1520∼1578)이다. 1578년 6월 1일의 ‘선조수정실록’에는 이후백의 일화가 적혀 있다. “이후백이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대화 중에 벼슬을 부탁했다. 이후백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목민관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은 거창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실천 하나가 백성들에게 감동을 준다.이런 선비가 청백리 기건(奇虔?~1460)이다. 호는 청파(靑坡)인데 집이 청파(靑坡 서울시 청파동)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다. 그는 걸어서 성균관에 다니면서 ‘대학, 중용’ 등을 외우곤 했다.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발탁됐다.일찍이 황해도 연안(延安) 군수가 됐는데, 군민(郡民)들이 군수에게 붕어를 바치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기건은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전남 순천시에 있는 팔마비(八馬碑)는 청렴의 상징이다. 팔마비는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낸 최석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선정비(善政碑)다. ‘고려사절요’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1281년(충렬왕 7년) 최석이 비서랑(祕書郞)으로 발령났다. 당시 승평부는 옛날 풍속이 수령이 전임(轉任)하면 반드시 말을 줬는데, 태수(府使)에게는 8필, 부사(副使)는 7필, 법조(法曹)는 6필의 말을 마음대로 골라 가게 했다.고을 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최석에게 고르기를 청했다. 최석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800년 6월에 개혁 군주 정조가 별세하자 정약용(1762~1836)에게 불행이 닥쳤다. 그는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 1801년 11월부터 1818년 여름까지 18년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살았다.1817년에 정약용은 국가경영 개혁안 ‘방례초본(邦禮草本)’을 지었다. 그런데 이 책을 마무리할 무렵에 갑자기 회의가 들었다.“이 책을 누가 볼 것인가. 누가 경세를 펼칠 것인가? 집권 세력 노론이 이 책을 보고 개혁을 할까?”극도의 회의 속에 다산은 책 이름을 ‘경세유표(經世遺表 경세를 유언으로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1905년 11월 18일 오전 1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틀 후인 11월 20일 월요일 새벽에 ‘황성신문’이 경성 곳곳에 배포됐다. 신문에는 주필이자 사장인 장지연이 쓴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5조약 체결 전말’이 실렸다. 먼저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읽어보자. “지난번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내한했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자임해 주선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말했다.“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찬성은 6인, 반대는 2인으로 가결이 됐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도록 주청해 달라.”이토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이토는 제지하며 “어찌 울려고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이후 한규설과 박제순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905년 11월 17일 오후 4시경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 넘어서 끝났다. 잠시 후 하야시 공사가 참정대신(총리) 한규설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물었다.한규설은 ‘폐하께서는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지시하셨으나, 우리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거듭 말했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중대한 협상을 앞두고 협상전략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노출한 것이다.이러자 하야시가 질책하고 나섰다.“폐하가 협상해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조약을 순조롭게 진행해야지, 대신들이 모두 폐하의 명을 어기니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1905년 9월 5일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11월 2일에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 특파대사로 임명했다.11월 5일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것이 독립을 유지하고 영원히 복을 누리는 길”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을사오적보다 더 나쁜 매국노들이었다.11월 10일에 이토는 고종에게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다시 알현하길 청했다. 그런데 일본은 11월 11일에 이토 대사 접대비 명목으로 무기명 예금 증서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