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청렴연수원 청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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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다. 이 길은 유학과 불교의 만남, 정약용(1762∼1836)과 혜장 선사(1772∼1811)가 걸었던 길이다.

1800년 6월에 정조가 갑자기 붕어했다. 정약용은 천주교 박해에 연루돼 1801년 11월 하순에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런데 그에게 거처를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맙게도 읍내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토담집 방 한 칸을 내주었다. 1802년 초봄부터 정약용은 아전 자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는데 ‘사의재’라 했다.

1805년 봄, 바깥출입이 자유로워진 정약용은 백련사를 들렀다. 백련사 주지 혜장은 처음엔 정약용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이내 알아보고는 잠자리를 청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주역을 논했는데 혜장은 실력을 뽐내다가 다산의 ‘곤초육수(坤初六數)’ 질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후 혜장은 다산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셨다. 1805년 겨울에 정약용이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도 혜장이 도운 것이다.

1808년 봄에 정약용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식사에 문제가 생겼다. 혜장은 젊은 중 하나를 보내어 다산의 밥시중을 들게 했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중(僧)에게 의지하니/ 가엾은 그중 수염이며 머리털 날마다 길어지네 / 이제 와선 불가 계율 모조리 팽개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다가 국까지 끓인다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시에서)

다산이 다산초당에 기거하면서 혜장과의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혜장은 주역과 논어 등을 더욱 좋아하게 됐고, 불법(佛法)을 소홀히 해 다른 승려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워낙 고집 센 혜장이었다.

한번은 다산이 혜장에게 ‘자네는 너무 고집이 세니 어린아이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라고 충고하자 혜장은 스스로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불러 다산의 뜻을 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불교는 멀리하고 유학에 빠졌고, 노상 술에 잔뜩 취해 지내다 병 들어 1811년 가을에 입적했다. 나이 40세였다.

혜장이 세상 떠난 날 다산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이름은 중(僧), 행동은 선비라 세상이 모두 놀라거니 슬프다, 화엄의 옛 맹주여! 논어를 자주 읽었고 구가의 주역 상세히 연구했네. 찢긴 가사 처량히 바람에 날려가고 남은 재, 비에 씻겨 흩어져 버리네. 장막 아래 몇몇 사미승 선생이라 부르며 통곡하네. 푸른 산 붉은 나무 싸늘한 가을 희미한 낙조 곁에 까마귀 몇 마리 가련타 떡갈나무 숯 오골(傲骨: 오만 방자한 병통)을 녹였는데 종이돈 몇 닢으로 저승길 편히 가겠는가. 관어각 위에 책이 천 권이요 말 기르는 상방에는 술이 백 병이네. 지기(知己)는 일생에 오직 두 늙은이 다시는 우화도 그릴 사람 없겠네.”

한편 1812년 겨울에 혜장의 두 제자가 다산을 찾아왔다. “스승님의 탑을 세워야 하는데, 선생께서 그 명(銘)을 지어주십시오” 하므로, 다산은 흔쾌히 승낙했다. 다산은 혜장의 탄생과 불교에의 귀의, 혜장과 첫 만남, 보은산방과 다산초당에서의 교류, 아암이란 호에 대한 내역, 혜장이 죽은 해에 쓴 자작시를 소개하고 명(銘)으로 끝맺었다.

“빛나는 우담발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었네. 펄펄 나는 금시조 잠깐 앉았다가 곧 날아갔네.”

‘아암장공탑(兒菴藏公塔)’은 해남군 대흥사 부도밭에 있다. 탑비 왼쪽 맨 아래쪽엔 ‘정약용 찬(撰)’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 이 길이야말로 갇혀 지낸 다산과 세속을 버린 혜장이 걸었던 슬프고 아름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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