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철종까지 10대 걸쳐 임금 거한 별궁
일제시대 강제 철거로 터만 남아
‘서궐도안’ 통해 건물 3채 문 1개 복원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는 붕당 간 갈등 완화를 위한 탕평책을 실시하고 백성을 위한 균역법을 두는 등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인물이다. 비록 정치 싸움으로 아들(사도세자, 훗날 장조)을 잃지만, 역대 왕들 중 재위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이러한 그가 아꼈던 궁이 하나 있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자리 잡은 경희궁이다.

경희궁은 일제식민지 시절, 일제로부터 건물이 옮겨지고 사라지는 등 아픔을 겪었다. 지금은 흥화문, 숭정문, 태령전, 자정전, 서암 등 경희궁의 중심부만이 겨우 복원돼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경희궁이 세워진 터는 원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광해군 때 왕궁을 지어 경덕궁이라 부르다 1760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280여 년 동안 서궐에 위치하면서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더불어 양대 궁궐 자리를 지켜왔다.

▲ 부서지는 등 모진 세월의 아픔을 겪은 선정전 우측 계단 ⓒ천지일보(뉴스천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이를 다시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었고, 서궐인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됐다. 경희궁에는 98채의 건물이 밀집해 있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별궁인 이궁으로 사용했는데,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은 일제식민지 시절에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경복궁과 더불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우면서 기존 건물들을 대부분 철거했으며,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다. 이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등 얼마 남지 않은 건물들마저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됐다.

일제는 경희궁 부지 24만 661㎡ 중 8만 5319㎡을 떼어 내어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지게 됐다. 한때 이곳에 경희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는 의미인 ‘경희궁터’로만 인식됐다.

▲ 태령전 뒤에 있는 서암 ⓒ천지일보(뉴스천지)
궁궐 본연의 모습을 전부 잃어버렸던 경희궁은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1985년과 1987년에 경희궁 유구(건물 적심석 등) 1, 2차 발굴작업을 벌였다.

1987년에는 흥화문, 1991년에는 숭정전, 1998년에는 자정전과 회랑,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 내에 복원됐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한 관계로 서쪽으로 약 100m 이동해 복원됐다.

경희궁 태령전(泰寧殿) 뒤편에는 ‘서암(瑞巖)’으로 불리는 기이한 모양의 거대 바위가 있다. 원래 이름은 왕의 바위인 왕암(王巖)이었는데, 광해군이 이 바위를 보고 왕의 기운이 서린 것으로 판단해 이곳에 궁을 지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또 바위샘이라는 뜻의 ‘암천(巖泉)’은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은 흔적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다가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됐다.

한편 오는 9월 1일부터 30일까지 경희궁 선정전 앞에서 고궁뮤지컬 ‘왕세자실종사건’이 공연될 예정이다.

▲ 경희궁 숭정문 전경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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