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자리 잡은 명성황후 생가 ⓒ천지일보(뉴스천지)

명성황후 생가(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 
여흥, 고려~조선시대 왕비 9명 배출
순종, 어머니 위해 비(碑)에 친필 남겨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고택은 화려하지 않지만 제 주인을 닮아 단아하면서 기품이 있다. 주인은 태어난 후부터 8세까지만 그곳에서 생활했다. 태어난 곳에서 비록 10년을 채우지 못했으나 8년간 글과 예절 등을 익혔다.

지난 3일 비가 그친 후 명성황후(민자영, 1851~1895) 생가를 찾았다. 경기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자리 잡은 집 주변은 조용하다. 액자에 담긴 명성황후 초상화가 방문객을 반긴다. 굳게 다문 입술, 매서운 눈매를 지닌 명성황후는 국모로서의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집의 규모는 일반 양반가와 달리 간소하다. 기대감을 안고 생가를 찾으면 예상 외로 작은 규모에 실망할 수 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대신 어린 명성황후가 대청마루에 앉아 글을 외거나 쓰는 모습이 떠올려 보자. 한적한 이곳은 어린 명성황후가 국모로서 소양을 기르는 데 안성맞춤이다. 집은 기존의 안채에 1995년 사랑채, 행랑채, 별당이 복원됐다.

명성황후의 본관은 ‘여흥 민씨’다. 여흥은 현재 경기 여주의 옛 지명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비 9명이 여흥에서 배출됐다. 이 가운데 왕비 4명의 본관이 여흥 민씨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명성황후의 5대조 작은할머니가 인현왕후라는 것이다.

▲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한 명성황후탄강구리비 ⓒ천지일보(뉴스천지)
생가 옆엔 명성황후가 탄생한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있다. 비석 뒤에는 순종이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 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란 친필을 남겼다. 비는 1895년 동학농민운동 때 소실됐으나 1904년 재건됐다.

집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감고당(感古堂)’이 나온다. 이곳은 여흥 민씨 종가에 있던 가옥이다. 숙종 때 인현왕후가 폐비돼 6년간 머물렀고 명성황후도 여주에서 8세 때 상경해 1866년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8년간 기거했던 곳이다. 원형은 왼쪽에 ㄱ자의 감고당, 오른쪽에 ㄷ자의 온고당이 나란히 있었다고 전해진다. 감고당은 원래 서울 옛 운현궁 앞에 있었다. 왕비들이 기거했던 감고당은 명성황후 생가보다 정돈됐다.

현재 명성황후 생가와 감고당은 보수공사가 진행돼 어수선하다. 서까래와 기둥 등 오래된 나무가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작업이 끝난 후 생가와 감고당을 찾으면 황후의 생활상을 충분히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명성황후기념관이 생가 왼편에 있어 명성황후의 일생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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