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곧은 마음을 닮은 심우장 (사진제공: 만해기념관)

조선총독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어
“마음 지켜 큰 도 깨우친다”
손수 심은 향나무 기상 뽐내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좋은 집은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는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향을 바라보고 있는 한옥 한 채가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55세부터 이승과 이별할 때(65세)까지 살았던 성북동 ‘심우장’이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경신고교 언덕을 넘어 가거나, 동소문동 입구에서 복개한 성북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85번 버스 종점을 만난다. 종점에 못 미쳐 좌측 골목으로 약 30m 정도 언덕을 오르면 심우장이 보인다.

심우장은 당시 남향으로 집을 지으려는 것을 본 만해가 “그건 안되지, 남향이면 바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조금 덥더라도 북향으로 하는 게 좋겠어”라며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으로 지어졌다. 한용운 선생에게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해는 1933년(당시 55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에 집 한 채를 갖게 됐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만해의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사람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다’는 뜻으로 만해가 직접 이름을 지은 택호(宅號)다. 마음을 소에 비유한 것으로, 참뜻은 ‘마음자리 바로 찾아 큰 도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다. 현판은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썼다.

만해는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이곳에 ‘단재탑’을 만들려고 하다가 발각돼 곤욕을 치렀다. 그는 심우장에서 <흑풍> <박명> <후회> 등의 신문 연재소설을 남겼다.

▲ 만해 한용운 선생과 그가 생전에 심은 항나무 (사진제공: 만해기념관)

심우장 앞마당 한편에는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을 뽐내고 있다. 또한 그가 묵었던 방에는 자필 글씨와 연구 논문집, 옥중 공판 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만해는 심우장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호의를 베풀었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는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세.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 것 일세”라고 타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일제로부터 지켜낸 이곳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던 곳이다.

1944년 만해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죽은 뒤 심우장에는 그의 외동딸 한영숙 씨가 계속 생활했다. 한 씨는 일본대사관저가 골짜기 너머에 자리 잡자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앞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시 기념물 제107호 문화유적지로 지정된 심우장에는 만해의 사상을 배우기 위해 지금도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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