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좌파 우파 꽃놀이패에 피멍드는 국민들
[정치평론] 좌파 우파 꽃놀이패에 피멍드는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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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참다 참다 더는 참지 못해서, 보다 보다 더는 보지 못해서 이번에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왔다. 채 싹도 트지 않은 민주주의 꽃밭을 유린하고 부패와 부정의 흙탕물로 나라의 뿌리마저 썩게 만들었던 이승만 정권은 떨쳐 일어난 학생들의 분노와 외침으로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두들겨 패기도 하고 총구로 위협하다가 방아쇠도 당겼지만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때 흘린 순결한 피와 의로운 함성이 하나가 된 그날, 우리는 그날을 ‘4.19혁명’이라 부른다.

4.19혁명 59주년을 맞는 날이다. 곳곳에서 기념행사도 열리고 학술대회도 열렸지만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스며있는 씁쓸하면서도 부끄러운 심경은 감출 수가 없다. 길거리로 뛰쳐나왔던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며 외쳤던 그 목소리가 요즘 따라 너무도 아프게 들리기 때문이다. 무려 59년이나 지났건만 그 때의 그 함성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화답하고 있는가. 깊은 반성과 성찰이 앞설 따름이다.

껍데기는 가라

정치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슐츠(Edward J. Shultz)라는 교수가 있다. 미국에서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국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저명한 학자이다. 물론 한국에 잠시 머물기도 했던 지한파이기도 하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해 서구 학계에서 ‘한국학’을 이끌고 있는 몇 안 되는 대표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에 대한 저서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이미 소개돼 있기도 하다.

4.19혁명 59주년을 맞아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슐츠 교수가 방한했다. 4.19혁명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하는 토론회였다. 이 자리에서 슐츠 교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전제로 ‘강한 한국’을 주문했다. 그리고 ‘강한 한국’과 통일을 향한 발걸음은 1960년 4.19 혁명이 추구한 가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날카로움과 혜안이 돋보이는 지적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는 발언 중에는 뜨끔한 발언도 나왔다. 그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갈수록 반목하며 다른 측이 제안하는 것은 덮어놓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성향을 목격하고 있다. 경직된 흑백논리로 이슈를 분석하려는 경향도 존재 한다”는 말을 했다. 슐츠 교수의 발언 중에 특별히 이 대목을 강조하는 것은 오랫동안 필자가 강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디 필자 뿐 이겠는가. 모리배 정치꾼들과 그들을 따라 다니는 일부 세력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다수의 민중들이 갖는 공통된 문제의식일 것이다.

슐츠 교수가 진단하듯이 사실 우리 사회는 극한 이념갈등으로 나라 전체가 길을 잃고 있는 형국이다. 사회적 이슈 하나가 터지면 문제의 본질과 해법을 찾기 보다는 좌파 우파의 색깔론으로 먼저 오염시켜버린다. 물론 그 중심에는 ‘모리배’ 같은 정치꾼들이 있고 사회 곳곳에 있는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라 다니며 덩달아 문제의 핵심을 짓밟고 다닌다. 서로 ‘네 탓’하며 욕설과 저주의 막말을 퍼붓기 일쑤다. 현실이 이럴진대 국민적 화합과 갈등의 조율 기능을 ‘정치 영역’이 담당하고 있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얘기가 되어 버렸다. 정치가 오히려 분열을 재생산하고 있으며 갈등을 촉발시키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탄식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세월호 참사 그리고 그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해 극언을 퍼붓는 광기를 보시라. 정치 모리배 수준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조차 찾기 어렵다. 그런데 그들을 옹호하는 일부 인간 군상들은 또 무엇인가. 하기야 그 중에는 4.19혁명 때 우리 학생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고 총을 쏜 패거리들의 후예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요즘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정책마저 그 수단의 적절성 여부가 아니라 ‘좌파 사회주의 정책’으로 낙인찍는 사회이다. 문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판의 수단이 모리배 수준이라는 뜻이다. 사안마다 현안마다 색깔론으로 도배질되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정책이 좌파로, 대기업 중심의 일자리 정책이 우파로 갈라지는 사회라면 비극도 보통 비극이 아니다.

내년 4월이면 21대 총선이 있다. 어쩌면 다시 좌파와 우파의 극한 대결이 재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싸우는 그 판국에 무슨 논리나 상식 또는 정책검증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흑백논리가 판치는 ‘진영싸움’일 뿐이다. 따라서 ‘낙인찍기’와 네 탓 공방, 그리고 막말과 증오, 저주의 설전으로 이어지는 요지경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덩달아 지역도 나뉘고 세대도 갈라지고 선거정치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라 안팎의 다급한 정세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미래를 이런 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기 징후가 아니라 이미 심각한 위기국면임을 각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정치권 안팎의 모리배들, 양아치 같은 꾼들부터 퇴출시켜 나가야 한다. 다시 4.19혁명을 생각해 보는 요즘 그런 바람이 더 간절하다. 슐츠 교수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결론을 위해 모든 진영이 절충하고 협력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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