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딱 100년 전 4월 10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거처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였다. 당시 임시의정원 기록에 따르면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에 개회해 이튿날인 11일 오전 10시에 폐회했다고 적고 있다. 밤을 꼬박 새워 12시간동안 열린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임시의정원 명칭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그리고 10개조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등이 선포됐다. 주요 안건을 통과시킨 이 날(4월 11일)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는 이유라 하겠다.

대한민국, 비록 시작은 이렇게 단출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실로 장대한 새로운 역사의 신호탄이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국호가 제정됐으며 헌정체제를 ‘민주공화제’로 규정한 최초의 기념비적 위업이었다. 당시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짧은 전문과 함께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정하고 있다. 그리고 2조에는 임시의정원 결의에 따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통치한다는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앞으로 도도하게 이어질 대한민국 역사의 첫 물줄기를 텄다는 점에서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시정부, 그 후의 눈물

1919년 당시 3.1운동(‘3.1 민중독립항쟁’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으로 국민적 독립의지를 확인한 각 지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곳곳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국내외에서 9개 안팎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의 <한성정부>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 임시정부가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통합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더 강화했던 것이 1919년 9월 임시의정원 6차회의에서 통과된 1차 개헌이었다. 그 결과 이승만 박사가 당시 통합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체제정비를 마치고 새롭게 출범한 임시정부는 뚜렷한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당시 상하이에 가지도 않았다. 결국 임시정부의 노선투쟁과 지도체제의 무능 그리고 재정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은 초라할 만큼 미약했다. 게다가 임시정부 헌장과 임시의정원 결의까지 무시하던 이승만은 외교적 돌출행동까지 보이면서 임시정부 안팎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결국 탄핵되는 결과를 낳는다. 명색이 독립운동가의 행보 치고는 참으로 비극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 사이 임시정부에 합류했던 무쟁투쟁의 전사들도 대거 임시정부를 이탈하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출범은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던 터에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게 된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고 있음을 간파한 김구 선생 주도로 같은 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결성된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들을 제거하겠다는 목표였다. 말 그대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셈이다.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안공근과 이수봉 등이 간부를 맡았고 유상근, 윤봉길, 이봉창, 이덕주, 유진만 등의 열혈 애국지사들이 참여했다.

김구 선생의 의중은 적중했다. 이듬해인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저우로 옮겨가지만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는 훨씬 더 높아질 수 있었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는 중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촉발시켰으며 당시 중국 국민당 총통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00만 중국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한 장제스의 말은 이 때 나왔다. 이때부터 중국 군관학교에는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가 드디어 무장투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으며 이후 창설되는 대한민국 광복군의 뿌리가 된 셈이다. 그리고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합의된 대한민국 해방은 장제스가 보낸 그 신뢰의 표상이었다.

1940년 임시정부가 다시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광복군이 창설된다. 이듬해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하자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을 보내 연합국 일원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미국 OSS부대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까지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일제가 미국의 원폭투하로 항복을 하게 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새로운 비극의 탄생이었다. 김구 선생이 통탄했던 그 대목이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도 미국의 방해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 독립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남쪽에서는 일제 주구들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고 이승만을 비롯한 분단세력이 단독정부를 강행하면서 대한민국 역사는 다시 대결과 저주, 학살이 난무하는 통한의 아픔을 반복하고 있다. 여순사태와 제주항쟁, 한국전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시위까지 어쩌면 임시정부가 흘렸던 그 땀과 눈물이 더 큰 피울음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이다. 여기저기서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냉철해지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그 지사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임시정부의 땀과 눈물을 폄훼하는 무리들은 누구인가. 지난 100년, 물론 자랑스런 것도 많지만 부끄럽고 참담한 역사도 많다는 것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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