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의 기득권 정치를 부수다
[정치평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의 기득권 정치를 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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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지난 21일 실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정치경험이 전무한 올해 41세 코미디언 출신의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가 결선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인 포로셴코(Petro O. Poroshenko)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3월 31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도 포로셴코 대통령보다 두 배 가까이 득표함으로써 사실상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긴 했지만 이번 결선에서의 압승은 우크라이나가 가야할 길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91년 소련 붕괴를 계기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국가다. 2014년 2월 러시아군이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러시아 영토로 병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도 러시아 인접 동부 지역의 영토분쟁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영향권에서 벗어나 점점 더 유럽의 일원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젤렌스키를 비롯한 유력 후보들이 대부분 ‘친서방 반러시아’ 성향을 보인 것도 이런 배경이다. 러시아가 이번 우크라이나 대선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이유인 셈이다.

분노한 민심이 젤렌스키를 선택하다

소련 붕괴로 독립은 했지만 우크라이나는 경제적으로 여전히 열악하다. 곡물생산과 철강석 등 자원은 풍부하지만 독립 이후의 경제개혁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7년 우크라이나 국내총생산(GDP)은 1200억 달러 안팎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인당 GDP는 3000달러에도 미치지 못 할 만큼 가난한 편이다. 여기에 친러 반군과의 전쟁으로 경제가 더 어려워지고 일자리도 찾기 어렵게 되자 유럽 여기저기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경제를 이끄는 독과점 대기업들의 부패와 탐욕, 특히 정치권력과의 유착비리는 전형적인 후진국 수준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대선이 한마디로 부패한 정치 기득권세력과의 전쟁으로 치러졌던 것도 이런 배경이었다. 정치신인 젤렌스키가 압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청렴한 ‘이미지’가 부패와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포로셴코 이미지와 극적인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2015년부터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에서 주인공으로 연기했던 그의 활약상이 그대로 청렴한 이미지로 굳어졌다. 드라마는 고교 역사교사 역할을 맡은 그가 정부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한 학생이 몰래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된다. 그 인기에 힘입어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 된 뒤 부패와의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젤렌스키는 이 드라마처럼 ‘반부패’의 상징으로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반면에 이번 대선에서 참패한 포로셴코는 2014년 ‘친러정권’을 몰아내고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지난 5년 동안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유럽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하려던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가난한 변방국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에 더해서 반군과의 전쟁까지 벌어지면서 사태는 더 악화됐다. 게다가 어려운 경제여건에서도 국방비를 대폭 증가해 논란을 일으켰던 포로셴코 대통령은 최근 자신과 연관된 방산비리가 폭로 되면서 국민적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큰 사업으로 부를 일군 포로셴코도 ‘반부패’를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결국 자신도 부패세력으로 내몰린 셈이다. 이번 대선에서 젤렌스키에게 사실상 ‘묻지마’ 몰표를 던진 것은 포로셴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세력과 그들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절망과 분노의 심판이었다.

최근 유럽정치의 지형변화 대세는 정치 기득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응징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세기 넘게 구축된 양당체제가 갓 출범한 신당에 의해 붕괴되기 일쑤이며 정치경험이 전무한 인물이 샛별처럼 등장해 권력을 장악하는 사례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슬로바키아 대선에서 승리한 변호사 출신의 45세 여성 카푸토바(Zuzana Caputova)의 스토리도 비슷하다. 정치신인 카푸토바의 승리도 ‘분노와 변화’가 핵심 키워드였다. 이처럼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격한 정치지형 변화는 생각보다 강하고 역동적이다. 벌써 그 변화가 러시아 인근까지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젤렌스키 돌풍의 이면에도 부패한 기득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강하게 배어있다. 코미디언 출신의 배우가 반부패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로 ‘국민배우’가 되고 그 역할대로 이미지화 되면서 실제로 정치권에 진입해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례는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다. 정치경험은 물론 이렇다 할 정치공약도 없었다. 그럼에도 몰표가 쏟아졌다면 그것은 극적인 만큼 반사이익에 기댄 ‘이미지 정치’의 극화(劇化)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 위험하고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젤렌스키는 당선을 확정지은 후 옛 소련 국가들을 향해 “우리를 보라.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옛 소련시절과 그 이후 독립국가로 이어져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강고한 기득권세력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부패구조를 향한 비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그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에서의 코미디 같은 드라마는 이제 끝났다. 이젠 행동과 성과로 화답할 차례다. 정치 기득권세력을 향한 젤렌스키의 도전이 한바탕 블랙 코미디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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