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그때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영세 자영업자들은 정치가 아니라 생존 문제가 더 다급했다. 자본과 노동이 양극단으로 치닫게 되자 정치마저 거기에 편승하면서 국가의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럴수록 대다수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고 특히 영세 수공업자나 자영업자의 삶은 더 절망적이었다. 게다가 국가마저 막대한 전쟁 배상금에 짓눌리면서 재기의 의지마저 회복하기 어려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히틀러가 등장하기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얘기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정치에서 왕정의 시대를 끝내고 공화정으로 나아가는 정치발전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에서도 역시 ‘경제’가 발목을 잡았다. 특히 전쟁 배상금 문제는 두고두고 정치 논란의 기폭제가 됐으며 이웃 프랑스의 개입은 경제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치가 그 답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회불안을 더 증폭시키기 일쑤였다. 특히 좌우 이념논쟁은 끝이 없었으며 그 중심에 있던 에베르트(Friedrich Ebert) 대통령은 임기 중에 사망했다. 좌파는 더 왼쪽으로, 우파는 더 오른쪽으로 치닫는 독일의 정세는 결국 화해와 연대, 공동체의 가치마저 짓밟으며 점점 위험한 길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인민은 가난했고 어디에도 호소할 곳 없는 그들에게 출구는 별로 없었다. 미래가 없는 그들은 점점 더 고독했고 절망했으며 속으로는 분노했다. 그 때 출구를 제공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히틀러였다. 당시 인민들의 삶과 인식체계를 분석하면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연구한 것이 바로 아렌트(Hannah Arendt)의 역작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인민이 왜 자유를 스스로 내려놓으며 ‘폭민(mob)’으로 변하는지, 어떻게 히틀러의 나찌즘(파시즘) 먹이가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촛불, 들불 그리고 맞불

문재인 정부 집권 3년차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보인다. 단순히 문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라는 여론조사 내용만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깊게 드리워진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가입했다는 ‘5030클럽’ 얘기는 꺼내기조차 어렵다. 청년들의 눈빛과 자영업자들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렵다. 이런 와중에 노인층과 공공부문 등을 중심으로 지난 2월의 고용지표가 개선됐다는 정부의 인식은 안일하다 못해 걱정스럽다.

특히 우리의 미래 성장산업이 결정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반도체 호황의 끝에서 그 이후를 고민하면 정말 답을 찾기 어렵다. 자동차 산업과 철강, 조선 산업도 전망이 불투명하다.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제조업 부문은 위기를 맞은 지 이미 오래다. 물론 정보 통신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한참 멀리 있다고 봤던 중국의 기술이 어느새 우리와 어깨를 같이 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안에 상황이 역전될 수 있다는 우려도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세계적 투자자인 짐 로저스 회장은 “다음번 경제 위기는 내 생애 최악의 위기가 될 것”이라며 글로벌 경제위기는 이미 시작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경제위기의 해법을 찾고 미래를 위해 적극적인 투자를 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많이 늦었다.

그러나 우리 정치판은 지금도 좌우 이념논쟁이 한창이다. 서로가 서로를 할퀴며 물어뜯는 ‘상극의 싸움판’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 극단의 막말과 상식의 역사마저 메치는 반역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치’, 그 막장의 정치판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조사 지지율이 조금 올랐다고 좋아라하는 일부 정상배들의 몰골은 이미 유령처럼 국민의 삶을 더 극단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겹다 못해 참담한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 일부 개각 명단을 발표했다. 그 면면을 보자니 솔직히 한국정치를 연구하고 비평하는 필자도 관심을 끊고 싶다.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게도 없다면 더는 문재인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이며, ‘우리 편’만 쓰겠다는 의지라면 더는 비평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내 사람, 내 맘대로, 내 권한대로 발탁하겠다는데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인사청문회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검증인들 해서 뭣하겠는가. 그저 ‘마음대로 하시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언제나 권력자의 해석보다 더 치열한 법이다. 뭣 하나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게다가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정치현실은 곧 국민에겐 ‘절망’에 다름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만큼 가혹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다. 처음엔 촛불이 ‘들불’이 될 줄 알았다. 정의를 말하고 ‘적폐청산’을 외치며 권력기구를 재편할 때는 그랬다. 그래서 ‘새로운 대한민국’이 펼쳐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불과 두어해 만에 들불은커녕 오히려 ‘맞불’이 더 거세게 일고 있다. ‘잉여’의 그들이 들고 일어나 판을 뒤엎고 있다. 그들을 앞세운 ‘극우’의 나팔소리 또한 드높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때 그 광장의 촛불은 하나 둘씩 꺼져만 가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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