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구애가 거세다. 최근 미국은 필리핀에 거대 투자를 약속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힘쓰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이 미국과 긴밀해질수록 중국과의 갈등 수위는 높아져 역내 불안감도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은 지적했다. 다음은 보웃 티다 발행인의 기고.

 

美 반도체 공급망 동남아 분산 의지

한국·대만·중국 역할 대체 가능성도

중국-필리핀 커진 갈등 파고든 미국

미중 아세안 주도권 경쟁 치열 전망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
보웃 티다 캄보디아 크메르라이프 발행인.

중국이 경기침체로 주춤하는 사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을 품에 안으려는 미국의 공세가 최근 더욱 두드러지는 형국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지난 13일(현지시간) 필리핀을 전격 방문했다. 미국 정부는 러몬드 장관의 필리핀 방문 목적이 인도·태평양 지역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방문에는 대통령 직속 거대 미국 글로벌 기업들이 무역 대표단에 다수 포함돼 있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유나이티드항공과 알파벳(구글 모회사), 블랙앤비치, UPS, 보스턴컨설팅그룹, KKR아시아퍼시픽, 벡텔, 페덱스, 마스터카드,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고 수준의 22개 대기업들이 동행했다.

미국 무역 사절단은 이번 필리핀 방문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약속했다. 이 투자 계획에는 필리핀 내 인공지능(AI) 채택 확대를 위한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필리핀 기업 간 파트너십, 필리핀 디지털 기술 향상이 포함됐다.

태양에너지와 전기자동차, 디지털화 분야도 눈에 띈다. 유나이티드 항공은 일본 도쿄 나리타와 필리핀 세부 간 노선을 오는 7월 31일 신규 취항한다고 발표했다. 사모펀드인 KKR&Co는 필리핀의 통신 타워 운영 확장을 위해 4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스타트업인 앨리파워(Ally Power)는 마닐라일렉트릭과 수소 및 전기 충전소 건설을 위해 4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美, 동남아서 반도체 공급망 다각화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동남아지역을 두고 미국을 견제해 온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도 반짝 긴장할 만한 투자 내용이 포함됐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러몬도 장관은 지난 12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한 지나 동남아시아의 반도체 제조 및 관련 산업에 미국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러몬도 장관은 “미국 기업들은 우리의 반도체 공급망이 전 세계 몇몇 국가에 너무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정학 문제는 둘째치고, 집중도 문제만 따져보더라도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에 위배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도체 공급망을 다각화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과 중국, 대만 등에 집중된 반도체 공급망을 분산시켜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순간이었다. 미국의 최첨단 반도체 설계 역량에 동남아시아의 자원과 노동력을 결합, 대만과 한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러몬도 장관은 아울러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반도체와 관련된 희토류 등 핵심 광물이 풍부하다”며 현재 13개 수준인 필리핀 내 반도체 조립과 시험, 포장 생산설비를 2배 수준으로 늘리자는 제안까지 했다.

이미 필리핀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등 여러 아세안 회원국들이 미국의 대중 반도체 기술 수출 통제 및 반도체 공급망 다각화에 따른 수혜를 받는 상황이다.

말레이시아는 미국의 반도체 수입 20%를 책임지며 대미 수출국 1위로 올라섰고, 베트남도 자국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 삼성전자와 엔비디아,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2030년까지 전문인력을 5만명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자국 내에서 생산한 반도체를 이들 국가로 옮겨 노동집약적인 후공정 작업을 마친 뒤 완제품 형태로 세계 시장으로 판매하겠다는 게 미국 정부와 자국 반도체 업계의 숨은 생각이다.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책임져온 대만과 한국뿐만 아니라, ‘일대일로’ 정책을 내세워 동남아지역에 공을 들여온 중국 입장에선 당연히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러몬드 장관은 필리핀에서 열린 행사에서 반도체 공급망 관련 기자의 질문에 일부러 중국을 의식하는 속내를 숨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중국이 우리의 가장 정교한 기술을 군사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실제 미국은 수년간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억제하기 위해 첨단 반도체 제조 기계와 인공지능(AI) 개발에 사용되는 정교한 칩의 수출을 전면 통제해 왔다. 반도체 제조 장비 개발의 핵심 국가인 일본과 한국, 네덜란드도 미국의 수출통제 정책에 당연히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가운데) 이 지난 12일(현지시간) 필리핀 마카티시에서 필리핀 비즈니스 그룹을 만나 미소를 짓고 있다. 미국은 이번 방문을 통해 필리핀에 대거 투자를 약속했다. (출처: 뉴시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가운데) 이 지난 12일(현지시간) 필리핀 마카티시에서 필리핀 비즈니스 그룹을 만나 미소를 짓고 있다. 미국은 이번 방문을 통해 필리핀에 대거 투자를 약속했다. (출처: 뉴시스)

◆자원·위치·中견제… 필리핀의 매력

필리핀은 그동안 중국과 비교적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필리핀은 남중국해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개발을 시작하기 위해 중국과 관계 개선에 공을 들여왔다.

지난해 1월 중국은 이에 화답해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처음 중국을 국빈 방문한 자리에서 필리핀의 전기차 및 광물 처리 부문에 73억 20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최근 양국 함정 충돌로 필리핀과 중국 양국 간 긴장감이 극도로 높은 상태다. 미국이 필리핀을 파고 든 시점이 절묘하다는 게 외교통상전문가들의 한목소리다.

필리핀은 당분간 중국과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신 미국과는 더욱 가까워지려고 애쓸 것이 분명하다. 현재는 미국이 제안한 여러 경제교류협력 투자도 쌍수 들고 반기는 모습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친미 성향 정치인이라는 점도 미국과의 우호 협력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 미국의 대규모 투자 제의는 필리핀의 입장에선 나름 큰 의미가 있다. 관료주의와 낙후된 인프라, 정책의 불확실성 등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가뭄에 단비’처럼 미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세안 홈페이지 데이터에 따르면, 2022년 필리핀은 120억 달러의 외국인 직접 투자를 유치했다. 베트남(157억 달러)이나 인도네시아(211억 달러)에 견줘 다소 뒤처진 수준이다.

하지만 만약 현재 미국 기업들의 투자 약속이 실현된다면, 필리핀은 주변 국가들에 상대적으로 뒤진 자국의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이참에 중국의 경제적 종속과 군사적 영향력에서도 벗어나는 데 더 없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필리핀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필리핀의 자원도 한몫을 한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남중국해 수역에 최대 약 110억 배럴의 석유와 190조 입방피트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태평양과 남중국해의 교차점에 있다. 필리핀은 태평양에서 셋째로 큰 섬 국가다. 이 때문에 필리핀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이 군사력을 동원하는 방안까지 불사하며 대만을 통일하겠다고 위협하는 마당이다. 미국은 이 때문에 이 지역 바다를 이어주는 군사적 기착점이 무척 중요한데, 필리핀이 최적의 대안이 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당선된 이래 필리핀은 중국보다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더 큰 힘을 기울여 왔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양국 간 국방 협정에 따라 필리핀의 여러 지역, 특히 남중국해를 마주한 지방을 포함해 4개의 새로운 군사기지가 들어설 것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이는 미국 국방부의 태평양 방어선을 구축하는 ‘섬 고리(Island chain strategy)’ 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의 남중국해 안보 취약성을 깨닫고 이를 지키기 위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미국이 필리핀의 군대 현대화에 대한 지지를 높이기로 한 약속을 얻어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이 필리핀을 자원 공급망의 주요 후보지로 선정하고 투자 개발에 나서려는 것은 자원 확보와 필리핀의 지정학적 가치가 필리핀이 여러 가지 정치적 불안과 정권교체 때마다 바뀌는 정책의 비일관성 등 여러 문제점들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美 필리핀 밀착에 아세안 국가들 긴장

미국이 필리핀을 광물자원뿐만 아니라 대만과 한국을 대체할 수도 있는 반도체 공급망의 일원으로, 더 나아가 자유 진영의 안보망으로도 활용도를 함께 고려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필리핀과 자원 공급망 협력 과정에 필요한 국가로 한국과 일본을 지목한 바 있다. 필리핀에서 배터리와 전기차를 개발하고 생산하려면 한국과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하지만 이는 동맹국의 한 축인 한국과 일본을 의식한 외교적 수사일 수도 있다. 필리핀을 비롯한 아세안 지역을 제2, 제3대 반도체 생산기지로 만들겠다는 미국의 계획이 대만과 한국, 일본 등 미국과 오랜 우호 및 동맹 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들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아세안 국가들은 미국이 과거 자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적극 귀환하려는 태도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지구촌 최강대국인 미국의 필리핀 투자가 지정학적 위험을 회피해온 고유의 외교 전략을 다시 불러들일까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당장 중국과 남중국해를 둘러싼 영유권 갈등이 악화될까 걱정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대신 중국을 주타깃으로 삼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월 미국 대통령에 재선하면 미국과 중국의 아세안 주도권 경쟁은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미국의 대만 부추기기까지 가세하면 중국의 군사적 움직임이 가시화될 수도 있다. 대만이나 필리핀에서 중국과 군사적 충돌 상황이 발생하면, 한국의 주한미군도 급파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동유럽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전쟁의 불씨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아세안 회원국들이 미국의 필리핀 투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걱정이 서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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