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국무, 필리핀서 ‘中견제’ 천명
미·일·필리핀 정상협의체 출범

통킹만 ‘새 영해선’ 그은 중국
남중국해 확장에 새 분쟁 불씨

필리핀, 대만 동맹과 관계 강화
자국 노동자 보호·中압박 목적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왼쪽)이 1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엔리케 마날로 필리핀 외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둘러싸고 중국과 필리핀 간 충돌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는 가운데 블링컨 장관은 이날 “필리핀과의 동맹에 대한 미국의 철통 같은 약속”을 강조했다. (출처: 뉴시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왼쪽)이 1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엔리케 마날로 필리핀 외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둘러싸고 중국과 필리핀 간 충돌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는 가운데 블링컨 장관은 이날 “필리핀과의 동맹에 대한 미국의 철통 같은 약속”을 강조했다. (출처: 뉴시스)

[천지일보=이솜 기자] 지난 19일(마닐라 현지시간) 필리핀을 방문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엔리케 마날로 필리핀 외교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남중국해는 필리핀의 안보와 경제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의 이익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우리는 필리핀과 함께하면서 철통같은 방위 책무를 지려 한다”고 말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필리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블링컨 장관은 페르디난드 R. 마르코스 주니어(Ferdinand R. Marcos Jr.) 대통령도 만났는데, 지난 2022년 8월 마닐라에서 만나 동맹 강화와 에너지·무역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한 이래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블링컨 장관이 마르코스 대통령을 만나던 날 카린 장-피에르 미 백악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이 발표됐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오는 4월 11일 백악관에서 마르코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초청, 첫 미·일·필리핀 정상회의를 가진다는 게 뼈대였다.

미국이 필리핀, 일본과 함께 3자 정상협의체 출범 소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백악관은 “이번 회의에서 3국 정상들은 3국 사이의 ‘철통같은 동맹’ 관계를 재확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中 영해권 주장에 곳곳 분쟁 가능성

필리핀은 오래전부터 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토 분쟁을 벌여왔다. 필리핀은 국제상설재판소(PCA)에 제소, 지난 2016년 ‘국제법상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중국은 남중국 전체에 U자 형태로 ‘구단선(九段線, nine-dash line)’을 긋고 선 내부 약 90% 영역이 자국 영해라고 주장해왔다.

최근에는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일으키려 벌인 자작극의 진원지인 ‘통킹만(중국명 베이부만)’을 시작으로, 섬이 많은 남중국해 전역에서 썰물 때만 드러나는 암초 위에 영구시설물을 세워 영해기점이라고 주장하며 영토확보 의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남중국해에 있는 파라셀군도(베트남쪽)와 스프래틀리(브루나이·말레이시아쪽), 파라셀제도(필리핀쪽) 3곳 전체가 분쟁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블링컨의 마르코스 대통령 접견 소식을 전하면서 ‘중국에 맞서는 필리핀 지도자, 새로운 파트너 네트워크 확보’라는 제하의 20일자 보도를 통해 “마르코스 대통령이 남중국해의 긴장 고조가 지역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라고 말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 말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전쟁이 나기 직전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발언을 상기시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 개시(2022년 2월 24일) 직전인 2월 19일(현지시간) “(집단서방) 파트너들의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독촉이나 구걸에 따른 기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8년간 유럽과 국제안보를 위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온 데 대한 대가”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길버트 테오도로 필리핀 국방장관은 지난 2월 7일 바타네스 군도와 대만 사이에 위치한 필리핀 최북단 마불리스 섬을 방문, “이 섬에 군사 주둔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고 필리핀 통신이 해군을 인용해 이날 보도했다.

이에 왕웬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튿날인 8일 기자들에게 “필리핀이 조종당해 결국 상처를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대만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틀 뒤 미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두고 수년간 중국과 맞붙어 왔지만 점점 더 동남아시아 국가가 또 다른 잠재적 전쟁터로 대만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마불리스는 대만 남단에서 불과 138㎞ 떨어져 있다.

ⓒ천지일보 2024.03.21.
ⓒ천지일보 2024.03.21.

◆中의 대만 통일에 변수 된 필리핀

리차드 헤이다리안(Richard Heydarian) 필리핀대학 아시아센터 선임강사는 타임지에 “필리핀은 중국이 지리적 근접성을 활용할 수 있는 창구이므로 침략이 발생할 경우 첫 48시간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미 해군이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대만을 예의주시하고 동맹국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만 하면 중국의 계산법을 크게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필리핀은 대만과 공식 수교를 하지 않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에 들어서는 미국, 일본 등 대만 동맹국과의 군사관계를 강화, 대만을 지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범서방의 공통된 기대다.

헤이다리안 선임강사는 “필리핀과 일본, 미국이 협력한다면, 중국의 침공이 일어나더라도 충분한 준비와 미국의 전진 배치, 여기에 미국과 동맹국 간의 충분한 상호운용성과 잠재적 조정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거듭 지역 군사동맹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타임지는 “필리핀이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동맹국에 대한 존경심 때문만은 아니며, 대만에서 일하는 16만명 이상의 필리핀 이주노동자 때문”이라며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국이 필리핀 기지에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자국 이주노동자들을 쉽게 구조하기 위함”이라고 논평했다.

마닐라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아시아태평양진로재단(Asia-Pacific Pathways to Progress Foundation)’의 루시오 피틀로 3세(Lucio Pitlo III) 연구원은 타임지에 “현재진행형으로 필리핀이 우선시하는 중국과의 남중국해 분쟁과 대만의 미래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말했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도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압력은 전 방위적일 것”이라며 남중국해의 중국 군사력을 겨냥했다. 그러면서 필리핀의 역할을 노골적으로 부각시켰다.

마닐라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 국제개발안보협력국(International Development and Security Cooperation)의 조슈아 에스페냐 부사장은 타임지에 “중국과 달리 필리핀은 도발자가 아니라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남중국해에서 중국 정부 선박이 필리핀 보급선에 물대포를 발사, 선원 4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필리핀 정부가 공식 발표했다.

호주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은 즉각 중국의 활동을 언급하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자제를 촉구했다.

호주와 아세안 회원국 지도자들은 지난 6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남중국해는 평화·안정·번영의 지역이라는 이점을 인식하고 있기에, 모든 국가가 평화·안보·안정을 위태롭게 하는 중국의 일방적 행동을 피하도록 권장한다”고 공동선언문에서 밝혔다. 호주 정부는 동남아시아의 해양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6400만 호주 달러(약 4200만 달러)를 투입할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비영리단체 미국평화연구소(USIP)는 최근 “중국은 공격적이고 강압적으로 가까이 치한 필리핀 섬에 주둔한 필리핀 해병대의 재보급을 막고 있다”면서 “중국의 목표는 필리핀 해병대를 몰아내는 것이며 최근 몇 달 동안 긴박감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베이징은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과 해양민병대 선박(어선 모양), 인민해방군 해군 선박이 결합된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런 ‘회색 함정 훈련’은 통상 해안경비대와 어선이 필리핀 선박을 위협하는 데 앞장서는 행태 이후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USIP은 중국이 전쟁의 문턱 바로 앞에서 위협적 행동을 유지하면서 언제든 무력을 행사할 태세를 갖춘 것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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