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요약

최근 러시아에서 한국인이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는 보도가 러시아 언론을 통해 나오며 의문이 쏟아진다. 실마리에는 한국과 러시아의 외교 관계의 변화가 있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관계가 바뀌면 반응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러, 그간 탈북 문제 인도적 처리

북한 항의에도 막후서 협조해와

 

우크라 전쟁 후 한러 관계 악화

탈북자 처리 방침도 변경한 듯

 

간첩 혐의 대북 첩보활동 추측

갈등 커지는 한러 관계 우려돼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 전 주러시아 공사. ⓒ천지일보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 전 주러시아 공사. ⓒ천지일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한국인 선교사 백모씨가 2개월 전에 러시아 당국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는 사실이 지난 11일 타스 통신의 보도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의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누군가에게 받아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백씨는 탈북자 지원에도 관여한 바 있다고 한다. 러시아 당국의 이런 조치는 최근 한국-러시아 관계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왜 체포한 지 2개월이나 지나서 언론에 보도됐을까.

◆중국과 러시아의 탈북 문제 대응법

이 사건의 전모는 현재까지는 러시아 당국의 설명이 없어 언론 보도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인데 과거 백씨의 행적으로 볼 때 탈북자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당국의 백씨 체포는 탈북자 처리에 대한 러시아의 방침이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 주민의 탈북 루트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이다.

중국의 경우, 탈북자를 적발하는 즉시 북한으로 송환하고 있어서 중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들은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에 들어가 한국으로 오는 험난한 여정을 겪어내야 한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를 한국 측에 인도한 사례는 전혀 없는 반면에 그간 러시아는 중국과는 달리 탈북자 문제를 인도적인 방식으로 처리해 왔다.

◆러시아가 탈북 문제 협조한 방법

한국 대사관이 탈북자를 보호하고 있는 한국인으로부터 상황을 알게 되면 대사관이 직접 전면에 나서지 않고 유엔난민기구(UNHCR) 모스크바 사무소가 러시아 정부를 접촉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러시아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사관은 러시아 정부의 처리가 순조롭도록 막후에서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고 러시아 정부가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탈북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헌법에 따른 한국 안에서 이야기이고 제3국에서 볼 때 탈북자는 북한 국적자이므로 러시아 당국은 한국 정부가 직접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북한 측이 러시아 정부의 탈북자 처리에 대해 사전이든 사후이든 인지하게 되면 보통 강하게 항의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2016년 러시아와 북한이 ‘상호 불법체류자 송환 협정’을 체결해 여건이 안 좋아질 것으로 우려됐으나 다행히도 러시아 정부는 계속 협조했고 이에 따라 탈북자를 돕는 한국인이 체포되거나 처벌받은 사례는 없었던 것 같다.

올해 초 한국 국민이 간첩 혐의로 체포된 사실이 뒤늦게 보도되면서 배경에 눈길이 쏠린다. 사진은 러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던 201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앙 기차역에 경찰차가 주차돼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올해 초 한국 국민이 간첩 혐의로 체포된 사실이 뒤늦게 보도되면서 배경에 눈길이 쏠린다. 사진은 러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던 2019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앙 기차역에 경찰차가 주차돼 있는 모습. (출처: 뉴시스)

◆우크라 지원 韓, 냉각된 한러 관계

그런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한국 정부가 여러모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러시아 정부를 반대하는 조치를 취함에 따라 러시아는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는 등 한-러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여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지난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과 회담을 갖는 등 러시아와 북한 양측은 상호 협력을 모색하며 접근했다.

그런 와중에도 푸틴 대통령은 지난 12월 초 신임 주러시아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서 한·러 경제협력 관계의 복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나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같은 달 26일 대러시아 수출통제 품목을 1480개로 대폭 확대하는 3차 제재 조치를 취했다.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이에 대한 브리핑에서 ‘미국의 지시에 따른 비우호적 행동’에 대한 보복 조치를 예고하면서 “보복 조치가 굳이 대칭적일 필요는 없다. 한국은 그러한 러시아의 조치에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백씨의 체포는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탈북자 처리에 대한 방침을 바꿈으로써 한국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제스처로서 취한 조치로 보인다. 어느 나라든 불법입국자 또는 불법체류자를 은닉하거나 도피를 돕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그간 탈북자를 한국 측에 인도한 것은 한국에 대한 호의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씨의 체포에 대해 국내 일각에서는 ‘인질 외교’를 운운했는데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2개월 지난 후에서야 정보 공개한 이유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는 체포 직후 한국 측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고 하는데 왜 2개월이나 지난 뒤 언론에 흘렸을까?

언론의 취재 활동이 서구만큼 자유롭지 않은 사정을 생각하면 타스 통신의 보도는 러시아 기자의 취재 결과가 아니고 러시아 당국이 정보를 제공한 결과로 보인다. 백씨의 체포 이후 3월 11일까지 두 달 동안 한-러 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보면 러시아 측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초 예정보다 3개월이 지나 2월 초 러시아 외교부 차관이 방한해 대통령실 및 외교부 고위 당국자들을 만났는데 경색된 양국 관계를 회복할 만한 결과는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의 ‘핵 선제 사용 법제화’를 놓고 양국 고위 외교 당국자 간 거친 말이 오고 갔는데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의 거친 표현은 러시아 외교부의 내부 분위기가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백씨는 러시아의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에 넘겼다고 했다. 최근 러-북 간 무기 거래와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핵무기 관련 기술 이전 가능성에 대해 한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외국 정보기관’이 한국 정보기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러시아 측은 백씨로부터 정보를 넘겨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했을 것이고 이와 관련해 한국 측에 모종의 조치를 요구하였으나 한국 측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사건을 언론에 흘린 것은 아닐까. 필자의 모스크바 근무 시절 기억으로는 러시아 측이 한국 측의 러시아 내 활동 중 가장 예민하게 관찰하는 것은 대북 첩보활동이었다.

◆점점 악화하는 한러 관계

한-러 사이에는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의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내한 공연이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강력히 반발한 이후 주요 매체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친(親)푸틴 발레리나’라는 논란 끝에 취소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민주주의 진영 결속을 위해 출범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지난주 서울에서 개최한 것을 두고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불명예스러운 행사’라고 비난하자 한국 외교부는 “외교부 대변인의 표현이라고 믿기 어려운, 상식을 벗어난 발언이라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한국 정부의 대러 정책을 보면서 경계한 상황이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북방외교의 결실로 맺어지고 지난 30여년간 나름대로 발전해 온 양국 관계가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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