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독립 후 이란과 협력
공식 관계 아니어도 서로 인정

이란은 팔 사는 자국민 보호
아랍 속 이스라엘은 생존 전략

종교 문제가 양국 관계 파탄
이슬람공화국 세운 후 원수 돼

편집자 주

최근 세계에서 가장 큰 갈등을 형성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이란. 이들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관계가 악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고 우호와 협력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종교로 인해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여기에 정치, 민족 등 다양한 요소가 더해져 우애는 사라지고 ‘증오’만 남게 됐다.

이란 출신 칼럼니스트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Shekoofeh Dadgostar Mansori)는 사이가 좋았던 두 나라가 어떻게 지금 철천지원수가 됐는지 설명했다. 세쿠페 칼럼니스트는 스페인 그라나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럽과 튀르키예, 이란 등을 오가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 칼럼니스트.
세쿠페 닷고스타 만소리 칼럼니스트.

지구촌에서 이란과 이스라엘만큼 독특하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중동의 소수 민족은 가장 강력한 종교적, 역사적 유대 관계를 갖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에는 각각 가장 중요한 이슬람 성지와 유대교 성지가 있다. 이 지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적 갈등을 겪고 있다.

70년 전 이스라엘 독립 후 최초 30년 동안 양국은 정치, 군사, 상업, 산업, 심지어 학문 등 모든 분야에서 우호와 협력의 정점을 유지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이란과 같은 우호 관계가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란의 최고 권력자인 왕을 샤(Shah)로 불렀는데, 1941년 9월 16일 즉위해 1979년 2월 11일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 왕조 제2대 샤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1949년 11월 16일부터 같은 달 21일까지 미국을 방문했다. 그 뒤 5개월쯤 지난 1950년 3월 5일 이란 각료회의는 모하메드 사에드 마라게이를 총리로 승인했다. 이는 이란이 이제 사실상 이스라엘을 인정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공식적이고 완전한 정치적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이란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사는 수천명의 이란인들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란은 같은 해 6월 레자 사피니아를 팔레스타인 특사로 파견했다. 당시 이란 정부는 실제 “이스라엘 정부를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란과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략적 목표이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는 아랍 국가들의 적개심을 상쇄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비아랍 축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1950년 이래 이스라엘 최초의 총리이자 이스라엘 건국자인 다비드 벤구리온의 정책이 말해준다. 그의 목표는 이스라엘과 에티오피아, 아랍이 아닌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 이란과의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의 상업 관계는 모하마드레자 샤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발전했다. 이스라엘은 페르시아만에 이란 해군을 위한 여러 기지를 건설하고 이란의 군사 및 안보 프로그램 개발에도 참여했다. 이란 케르만에 이스라엘과 협력한 대함미사일 공장 건설까지 착수할 정도였다.

물론 이란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1950년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특사를 보낸 뒤 이란은 아랍인과 이슬람 세계 일부 국가의 격렬한 항의에 직면했다. 그 여파로 2년 뒤 특사 사무실은 폐쇄되고 이란과 이스라엘 업무 처리는 테헤란과 텔아비브 주재 스위스 대사관에 위임됐다. 겉으로는 이란과 이스라엘이 관계 단절에 이른 것으로 보였지만, 양국은 은밀하게 의사소통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테헤란 카크 거리에 이스라엘 대표 사무소를 설립하고 텔아비브에 이란 대표 사무소를 다시 열었다.

1950년 6월 예루살렘의 Y.M.C.A.에서 이란 공사관이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서 레자 사피니아 이란 장관(오른쪽)이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왼쪽)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950년 6월 예루살렘의 Y.M.C.A.에서 이란 공사관이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서 레자 사피니아 이란 장관(오른쪽)이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왼쪽)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스라엘의 파괴’ 외친 새 이란 정부

하지만 종교 문제가 양국의 관계를 파탄으로 인도했다.

이슬람 호메이니는 1963년 6월 3일에 유명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같은 해 6월 5일 폭동의 기폭제가 됐다. 많은 학자들은 1963년 6월 5일의 사건을 15년 후 이란에 이슬람 정권을 수립하게 된 혁명의 전조로 간주한다.

연설에서 호메이니는 “종교가 위험에 처해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 코란과 종교 학자, 이슬람 율법이 존재하는 것을 반한다. 이스라엘은 흑인 공작원(Fiziyeh Qom)의 요청으로 학교를 파괴했다”며 “그들은 이란을 통제하고 싶어 하고 무역과 농업을 망쳐 이란 경제를 파괴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란이 가난해지고 이란의 부를 이스라엘 요원들의 손에 넘기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란과 이스라엘 정부 사이의 적대감의 씨앗은 이슬람공화국 건국과 함께 양국에 파종됐다. 1979년 이란 이슬람공화국 건국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과 이란의 외교관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새 이란 정부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파괴를 요구했다. 이란 혁명 이후 45년이 지난 지금은 단순히 성명 발표 수준을 넘어 양국 간 전쟁 위험에 이를 정도로 구체적인 적대 조치를 수없이 취했다.

모하마드 레자 샤의 몰락 직후인 1979년 2월 19일, ‘메흐디 바자르간’이 이끄는 이란 임시정부는 성명을 발표했다. 29년간 이어온 이란과 이스라엘의 수교를 철회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이스라엘 주재 이란 대표부 직원을 본국으로 소환했고, 이란 주재 이스라엘 직원 32명은 해고됐다.

테헤란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은 혁명과 샤의 타도를 축하하기 위해 이란에 있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넘겨졌다.

이란 혁명 정부와 이스라엘 정부 사이의 정치적 동맹이 종료된 후, 아직 이슬람공화국으로 불리지 않았던 루훌라 호메이니 정부는 이스라엘을 외교문서에서 지웠다. 이스라엘은 이후 ‘시온주의 정권’이라고 불리웠다.

이란은 유엔 연설에서 “이스라엘은 암종으로, 지구촌에서 사라져야 한다”며 극심한 증오를 드러냈다. 이는 이란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이어졌다.

복잡다기한 두 나라 관계의 성격은 이란이 시아파 인구가 대다수인 이슬람 국가라는 사실과 밀접하다. 이스라엘은 유대인보다 수니파 무슬림에 대해 더 높은 민감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이란은 자국 영토의 일부를 지배하고 페르시아만을 통제하려는 아랍의 열망에 대해 항상 우려를 보여왔다. 아랍인들이 계속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이란에게 귀중한 지렛대가 될 수 있었다.

이슬람 시아파와 이슬람 수니파, 이스라엘의 ‘삼각 증오’는 2024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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