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연구소장

 
그를 처음 본 건 1989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 때였다. 훤칠한 키, 말쑥한 용모, 세련된 언변의 그는 국제신사다운 모습이었다. 딱딱한 말투, 굳은 표정의 일반적인 북한 대표와는 많이 달랐다. 남한 대표 못지않게 유연한 자세로 회담을 이끌었다. 회담 결과의 주요 내용을 브리핑 할 때, 그의 말 하나 하나가 모두 그대로 기사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말솜씨를 과시했다. 그는 북한의 대표적인 스포츠 외교관이었던 것이다.

지난주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에서 물러난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한에서 캐나다로 망명한 초대 최홍희 총재 이후 13년째 ITF 총재를 맡아온 장웅 위원은 그동안 ITF 사무총장을 지낸 이용선 조선태권도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총재 자리를 물려주고 종신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오랫동안 ITF 총재를 맡았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장웅 위원은 남북 체육관계에서 주요한 인물로 활동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서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와 함께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을 성사시켰으며, 2007년 조선태권도위원회, ITF 시범단과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등 한국이 IOC 총회에서 주요 의제를 상정할 때, 그는 북한 대표로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가 활동한 수십년간 북한 체육은 많은 부침을 보였다. 남북 대결에서 북한은 큰 전력차이로 한국에 밀렸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스포츠에 투자를 하기가 어려웠던 북한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복싱, 체조, 유도, 여자 마라톤 등 일부 종목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이 등장했지만 이미 세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 잡은 한국에게 북한은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었다. 주체사상을 앞세워 국제적으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북한은 스포츠에서는 자존심으로 버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북한 스포츠의 실력 이상이었다. 뛰어난 영어실력과 국제신사다운 풍모를 바탕으로 IOC 총회와 같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나름대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과 관계된 남북문제에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전략과 태도로 주목을 받았다. 농구선수 출신인 그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IOC 총회에서 개인자격으로 한국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IOC 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북한을 대표하는 스포츠 인사로 본격 등장하게 됐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때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던 그를 만났었다. 남북한이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던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스포츠를 통해 북남이 함께 손을 잡고 통일의 물꼬를 틀 수 있기를 바란다”며 남북한 스포츠 교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후 남북한은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세계축구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역사적인 첫 단일팀 구성에 성공했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 공동입장의 성과를 이룩했다.태권도뿐 아니라 남북 체육교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만큼 그의 사퇴는 앞으로 남북 관계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많다. 2018년 80세로 IOC 위원 정년을 맞는 그는 북한 스포츠 고위 관계자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많은 활동을 했었다. 60대의 나이로 타계한 전임 김유순 IOC 위원에 이어 IOC 위원이 됐던 그는 북한 스포츠의 대내외적인 문제에서 박명철, 문재덕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장관)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앞으로 남북은 평창동계올림픽 공동개최 등 여러 현안 등을 본격 논의할 예정이다. 장웅 위원이 공식 은퇴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ITF 총재자리에서 물러난 그의 영향력은 예전보다는 많이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 장웅 위원이 공직에서 은퇴를 하더라도 남북관계가 1990년대처럼 해빙무드를 다시 찾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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