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언론정보연구소장

 
2015 광주 유니버시아드서 2주간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로 국제협력관을 맡아 많은 국내외 주요 스포츠계 인사들을 경기장 VIP석으로 안내했다. 사람을 모시는 일 자체에서 얻는 보람도 있었지만, 정작 행복했던 것은 어릴 적 추억의 스포츠 영웅들을 모처럼 가까이서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도시인 광주에서 대회가 열린 터라 경기장을 찾은 스포츠 영웅들은 부득불 숙박을 해야 했다. 평상시 잠깐씩 얼굴을 보던 방열(74) 대한농구협회장, 신동파(71) 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이인표 (72) 전 KBL 패밀리 회장, 김인건(71) 전 태릉선수촌장, 박한(70) 대한농구협회 수석부회장 등은 대회 기간 여러 차례 경기장을 찾아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서울에선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간간이 만났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들은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인 1960~70년대 초반 한국 농구를 빛냈던 스포츠 영웅들이었다. 한국 농구가 본격적으로 아시아 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던 것은 이들이 맹활약하던 때였다. 이때 농구는 축구, 야구와 함께 골목대장이었던 내 또래의 애들에게는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다. 주로 필리핀 마닐라, 태국 방콕 등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 한국농구는 승승장구하면서 이렇다 할 놀 거리가 마땅치 않았던 당시의 어린 꼬맹이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었다.

방열 회장은 김영기 KBL 총재와 함께 1964년 도쿄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한 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현대, 기아 감독과 대학교수와 총장을 거쳐 경기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3년 전 대한농구협회장에 선출됐다. ‘아시아의 슈터’로 이름을 날린 신동파 전 농구협회 부회장은 당시로써는 센터에 육박하는 큰 키로 1969년 아시아 선수권대회 필리핀과의 결승에서 무려 50점을 쓸어담아 아직도 필리핀에선 할아버지, 아버지대에 이어 어린 학생들에게도 한국 농구의 레전드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인표 전 회장과 김인건 전 선수촌장은 슈팅가드와 포인트 가드로 황금의 콤비를 이루며 역대 농구 가드로서는 최고의 기량을 과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한 수석부회장은 당시 대표팀 부동의 장신 센터(192㎝)로 골 밑을 지키며 뛰어난 활동을 했다. 한국 농구가 1969년 아시아 선수권대회 우승,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스포츠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결승리그에서 강호 이스라엘을 물리치고 금메달을 수상하는 현장 라디오 중계를, 수신 사정이 좋지 않아 잡음이 섞인 소리를 통해 밤중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던 45년 전의 기억이 새롭다. 우승 다음 날 골목에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중계방송에서 들었던 경기 상황을 재현하는 ‘소식 전달자’ 역할을 했던 것은 짜릿했던 우승의 경험을 나누고자 했던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스포츠 기자를 하게 되면서 어릴 적 스포츠 영웅들을 가까이서 취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농구담당 기자 시절에는 이들 대부분이 대학 및 실업팀 감독이나 단장을 하던 무렵이라 개인보다는 팀 전력과 관련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기자 시절에는 스포츠 영웅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농구의 역사에 대해 쓸 수 있는 시간을 갖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사명감과 책임의식이 약한 것도 있지만 기자로서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 가까이 본 내 어릴 적 스포츠 영웅들은 어느덧 고령에 접어들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이 조금이라도 기억이 살아 있을 때 생생한 육성을 통해 과거의 화려했던 한국농구의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단 농구뿐 아니라 축구, 야구, 배구 등 한국 스포츠 현대사에서 탄생한 많은 스포츠 영웅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잘 보존할 필요가 있다. 어르신을 잃는 것은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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