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제나라 환공이 죽은 뒤 진(晋)나라 공자 중이 일행은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에서 푸대접을 받고 송나라에서 잠시 머물다가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다시 정나라로 갔으나 정나라 문공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 숙점이 왕에게 간했다. 중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다음에 화근이 될 것이니 죽이라고 했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중이는 또 다시 남쪽의 큰 나라인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성왕은 의외로 큰 환대를 했다. 장군 자옥이 못마땅하여 당장 죽이라고 하자 성왕은 그들을 이해하라며 잘 타일렀다.

중이 일행이 초나라에 머문 지 몇 개월이 지났다.

그 무렵 인질로 있던 진(晋)나라 태자 자어가 진(秦)나라에서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진(秦)나라에서는 자어의 배신에 크게 화를 내며 중이가 초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곧장 중이를 초청하려고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초 성왕이 중이에게 권유했다.

“우리 초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앞으로 진(晋)나라로 돌아가시게 된다면 수많은 나라를 지나야만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진(秦)나라는 바로 이웃에 있으므로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이왕 초청이 왔으니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소.”

그렇게 말한 초나라 성왕은 중이를 후하게 대접하고 진(秦)나라로 보냈다.

초나라를 떠난 중이는 진(秦)나라에 무사히 도착했다. 진나라 목공은 자기 집안의 여자 다섯 명을 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 아가씨들 중에는 진(秦)나라를 탈출한 자어(중이의 조카)의 아내까지 포함돼 있어서 중이는 망설였다. 진(秦)나라 사공인 계자가 건의했다. “도대체 자어의 나라를 무찌르겠다는 분이 부인을 거절하시다니 어찌된 셈입니까? 무조건 받아들이시고 우리 진나라와 인연을 맺어 귀국하시는 방패로 삼으십시오. 사소한 대접이나 예에 구애되어 큰 뜻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중이는 그 청을 받아들였고 목공도 기뻐하여 중이와 함께 축배를 들었다. 축하연 자리에서 조쇠는 고향의 그리움을 ‘서묘의 시’를 읊었다.

“귀공이 얼마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그 마음을 알 수 있겠소.”

목공의 위로의 말에 중이와 조쇠는 계단 밑으로 내려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런 힘도 없는 저희를 헤아려 주심은 마치 가뭄에 곡식이 단비를 맞는 거나 진배없습니다.”

중이가 진(秦)나라를 찾아 간 때에는 진(晋) 혜공 14년 가을이었다. 그 해 9월에 혜공이 세상을 떠났고 자어가 뒤를 이었다. 11월에는 혜공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 다음 달 12월에 대부 난지와 극곡 등이 중이가 진(秦)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찾아왔다.

그들은 중이와 조쇠 등에게 적극적으로 귀국을 요청했으며 그들이 귀국하는 날에는 수많은 사람이 지지하리라는 뜻을 전했다. 

진(秦)나라 목공은 군대를 동원해서 중이의 귀국을 도와주었다. 진(秦)나라 군대가 출동했다는 정보를 듣고 진(晋)나라 쪽에서도 군대를 동원해 제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중이의 귀국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며 이에 반대하는 것은 겨우 혜공 때의 중신인 여성과 극예 일파일 뿐이었다.

망명한 지 19년 만에 중이는 마침내 귀국에 성공했다. 그때 그는 62세였으나 그의 귀국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귀국한 중이는 진(晋)나라 문공(文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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