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부르던 것인데, 양반들은 권력을 누리고 살았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들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특권도 많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신분 변동이 일기 시작했고 19세기에 이르면 상민 천민 구분이 거의 사라지고 양반 수도 크게 늘어 양반 대접도 예전만 못하게 됐다. 너나 할 것 없이 양반 행세를 했고, 거리에서 멱살잡이를 하면서도 “이 양반아~” 소리를 해댔다. 말이 양반이지 사실은 “이놈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후기로 오면서 양반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학생 신분인 유생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지역에 뿌리내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가통을 이어가는 정통 양반은 아니었지만, 유생으로 인정만 되면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생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고을마다 유생 명부가 있어 여기에 이름을 올리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향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생 명부에 이름을 실으려 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천민들까지 유학을 모칭(冒稱)하니 나라 백성들 모두가 유생이 될 판이라고 한탄했다. 군대 면제를 받기 위해 노비들까지 유생이 되려고 한 것이다.

조선시대 군역은 상민과 천민들 몫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자 임금인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서둘러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백성들이 그 꼴을 보고선 돌과 오물을 집어던지며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선조는 심지어 명나라로 망명하려고까지 했다. 만백성의 어버이라는 임금이 그 모양이었다. 임진왜란의 전세가 기운 것도 공을 세우면 천민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면천법(免賤法) 때문이었으니, 결국 불쌍한 천민들만 피눈물을 흘린 셈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선조 못지않았다. 전쟁이 터지자 가장 먼저 피난을 떠난 게 이승만이었다. 새벽에 경무대를 빠져나와 특별 열차로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너무 많이 왔다 싶었던지 대전으로 되돌아왔고, 거기에서 국민들은 안심하라며 녹음 방송을 했다. 서울 시민들은 피난 짐을 도로 풀었다. 

대통령이 도망을 가자 국방장관 신성모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등이 계급 순으로 줄줄이 한강을 넘었다. 그들이 한강을 다 넘고 나서 바로 한강 다리가 폭파됐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강 다리 폭파의 책임은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이 져야 했지만 현장의 실무 지휘관이었던 최창식 공병감이 죄를 뒤집어쓰고 총살형을 받았다. 후에 국회 등에서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했지만 이승만은 거절했다.

이 부끄러운 과거사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을 뽑는다며 청문회다 뭐다 해서 요란을 떨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병역 문제다. 당사자는 물론 그 자식들의 병역 면제 사유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국민들은 의구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지만, 결국에는, 다 그런 것이지, 하며 먼 산을 바라볼 뿐이다.

국민들 눈은 밝아졌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더 밝은 세상이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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