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화병(火病)이라고 하면 옛날 며느리들에게나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에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그렇게 할 말 못하고 억눌려 살다 보면 가슴속에 응어리가 지고, 그것이 쌓여 병이 된다는 것이다. 울화병(鬱火病)이라고 하는데,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질환이랄 수 있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서도 1996년 화병을 한국 특유의 문화관련 증후군으로 인정했다.  

혹독한 시집살이도 사라지고 세상이 더욱 밝아졌다고 하는데, 화병은 오히려 더 늘고 있다고 한다. 희한한 일이다. 최근 어느 취업포털 회사에서 설문 조사를 했더니, 직장인 열에 아홉이 화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화병이 생긴 이유를 물으니, 상사와 동료와의 인간관계에 따른 갈등이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과다한 업무와 업무 성과에 따른 스트레스’ ‘인사 등 고과산정에 대한 불이익’ ‘이른 출근 및 야근으로 인한 수면 부족’ ‘퇴출과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상사나 동료들과의 관계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나 스트레스가 가장 많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수직적인 상하 관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유교 문화 등이 어우러진 직장문화 탓일 것이다. 군대시절의 경험을 공유하는 남성들이 주도하는 직장이라면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다.

권위적인 상사를 둔 직장인일수록 화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직장생활 몇 십 년을 했네, 하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상사일수록 아랫사람들의 고통이 큰 법이다. 시절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졌는데도, 아득한 시절의 예절이나 가치를 들먹이며 젊은 부하 직원들을 들들 볶는 상사만큼 꼴불견도 없다.

몇 해 전, 젊은 세대 사이에 유행하는 댄스를 남몰래 연습한 다음 부하 직원들과 어울려 한바탕 춤을 추는 광고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젊은 부하 직원들과 함께 춤을 추며 소통하고 공감한다는 메시지였다. 이처럼 부하 직원이나 후배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하는 상사들도 많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스스로 눈과 귀를 가리는 어리석은 상사들도 많다. 어지간한 잘못 아니고서는 해고당할 일 없는, 소위 ‘철밥통’ 직장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폭군 상사 밑에서 일하게 되면 영혼이 말라가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상사 생각으로 머리를 쥐어뜯고 가족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거나 난폭한 모습을 보여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기도 한다. 폭군 상사는 심하게 말하면 가정 파괴범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병폐로 떠오르고 있는 ‘갑질’ 상사가 바로 그들이다.

직장인뿐 아니라 20대 젊은이들과 노년층까지 화병이 늘고 있다고 한다.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민들에게 화병을 안겨 준 장본인이 최근 회고록인가 뭔가를 내고서 제 자랑을 해대고 있다. 이런 인간들 때문에 화병이 더 도진다. 국민들의 화병을 고쳐줄 처방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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