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낳아 전라도 수령을 시키는 것을 소원했다고 한다. 전라도는 농토가 많고 국가 재정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충당할 정도로 농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광주목사가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토호들과 향리들을 들볶아 평생 먹을 것을 챙길 수 있었다. 전라도 수령은 외지 사람이 주로 차지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은 수탈에 시달렸고 여기에 맞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무렵에는 전국의 10만석 부자 중 절반 이상이 호남지방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 풍양 조씨 등이 권세를 누리면서 부가 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권문세가들이 벼슬을 독차지하여 갖은 방법으로 토지를 늘리고 농산물을 갈취했다. 호남 농민들은 나라에 호소도 해보고 죽창을 들고 관아에 쳐들어가 ‘나쁜 사람’들을 징치하기도 해 보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호남 출신들의 중앙 정치 무대 등용은 더욱 어려워졌다. 뜻 있는 사람들은 지역 차별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호남의 선비들은 죽도록 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해봤자 권문세가들 자제들에게 밀려 합격을 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과거에 붙더라도 알짜 자리는 주지 않고 별 볼일 없는 자리만 돌게 하기 일쑤였다. 철종 때는 참다못한 전라도 유생 수백명이 과거 시험이 치러진 성균관 주변에 모여 한 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조선은 건국 이후 노골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펼쳤다. 조선 초 함경도에서 이징옥과 이시애가 반기를 들자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 등 서북 지역 사람들의 등용을 제한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조선 말기까지도 그 굴레를 벗지 못하고 소외당했다. 조선 중기에는 전주 출신인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호남지역이 역향(逆鄕)으로 찍혔고, 조선 후기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기호지방 사람들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는 바람에 중앙 진출이 힘들어졌다.

정약용은 지역차별을 안타까워하며 “평안도, 함경도를 버렸고 황해도 개성, 강화도를 버렸고 강원도, 전라도의 반을 버렸다”라고 기록했다. 조선 시대는 특정 지역과 파벌들이 권력을 독점하였고 후기에 와서는 기호지방의 노론 계열 사람들이 득세하고 나머지들을 소외시켰다. 조선 시대 내내 권력을 놓고 당파싸움을 벌였고 거기에서 밀린 사람들은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일제시대 들어서도 당파싸움의 잔재들이 사라지지 않았고 해방이 되고 나서도 권력자와 정치하는 사람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이용하면서 지방 간의 불신과 분열이 더욱 깊어졌다.

지역감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 탓이 크다. 그들은 내 지역 사람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표를 주는 ‘묻지 마’ 투표를 좋아한다. 깃발만 꽂으면 되는 걸 좋아하지, 지역과 상관없이 제대로 된 인물을 뽑자 하면 싫어한다.

정치적 산물인 지역감정이 보통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로까지 이어져는 안 된다. 얼마 전 특정 지역 출신은 안 된다는 어느 회사의 채용공고가 문제가 됐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 끼리 이러면 안 된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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