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이 쓴 <촌주팔영(村廚八詠)>이라는 시에 게장을 노래한 대목이 나온다.

당년에 비틀비틀 옆걸음 치던 곽색으로 / 當年郭索且
어찌 알았으랴 오정 사이에 젓 담글 줄을 / 那料沈五鼎間
한 딱지 두 집게다리가 모두 맛이 좋으니 / 獨殼雙俱有味
의당 술에 넣고 또 밥 더 먹기 꼭 알맞네 / 也宜點酒更加餐

조선 중기의 선비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원에 칩거하며 많은 시를 남긴 이응희도 게장 맛을 예찬하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껍질 속 향긋하고 노란 게장 / 香滑鉤金醬
다리 속 부드럽고 흰 맛살 / 甘柔嚼雪肌
고대광실에서 호식하는 이들은 / 朱門大牢客
이 맛을 알 리가 없으리라 / 玆味鮮能知

이미 조선 전기 때부터도 게장을 밥도둑으로 여기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의 <청장관전서>에 “게딱지에 밥을 담아 먹지 말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식사예법에 어긋난다는 가르침이다.

<경종실록(景宗實錄)>에는 경종이 사망하기 며칠 전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이 불과 36세의 나이에 병사하자, 그 죽음이 이복동생이자 영조로 왕위를 잇게 되는 연잉군이 게장과 생감을 먹여 독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소론의 이인좌는 그것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참수되고, 경종의 스승이었던 김일경 역시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서다 처형당했다.

이렇게 맛있는 게장이 엉뚱하게 정변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게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규합총서(閨閤叢書)> <주방문(酒方文)> <시의전서(是議全書)>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기술된 다양한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 게장(자료사진)

그 중 17세기 말에 저술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게장을 만드는 방법을 ‘조해법(糟蟹法)’이라고 해 술지게미로 절일 때는 소금과 술을 함께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만든 게장은 오랜 시간 보관할 경우 쉽게 상하지만, 조해법으로 담근 게장은 다음해 봄까지도 상하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시의전서>에는 게장을 담그는 방법으로 조해법 뿐만 아니라 ‘주해법(酒蟹法, 술로 절임)’ ‘초장해법(醋醬蟹法, 초장으로 절임)’ ‘염탕해법(鹽湯蟹法, 끊인 소금물로 절임)’ 등이 나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육선치법(肉膳治法)’이라고 해 게를 키우는 방법도 기록돼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기록으로 미뤄보아 한국에서 게장을 먹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1600년대 이전임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민물 게를 이용해 게장을 담갔으나, 민물 게가 드물어짐에 따라, 황해에 서식하는 꽃게와 남해안의 돌게(박하지)를 이용한 게장이 보편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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