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 김영복 원장

“스님들이 제석(除夕, 섣달그믐)날 밤에 자정이 지나면 인가의 문밖에 와서 ‘재 올릴 쌀을 주시오’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수세(守歲)하느라고 모여 앉아 떠들며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 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벌써 새해가 다 되었군’한다”고 ‘열양세시기’에 기록돼 있다.

설이 되면 스님들이 북을 등에 걸머지고 저잣거리에 내려와서 법고(法鼓)를 치며, 집집을 돌며 염불하며 권선(勸善)한다. 이때 스님들은 떡을 만들어 속가에 주는데 스님이 떡 한 개를 주면 속가에서는 두 개의 떡을 준다. 예로부터 절에서 만든 떡은 마마를 곱게 한다는 속설이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이 떡을 절떡(僧餠) 또는 법병(法餠)이라고 한다.

절떡(法餠)은 옴자떡을 말한다. 이 옴자떡은 범자(梵字)의 ‘옴(ॐ)’ 무늬가 들어가 있는 떡살을 절편에 찍어 낸 것이다.

옴자떡에 대한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어린아이가 옴자떡 하나를 베어 먹다 땅에 떨어뜨린 것을 지나가던 개가 주워 먹고 인도 환생했다”는 것이다.

절편은 쌀을 물에 불렸다가 빻아 체로 친 다음 찐다. 찐 것을 안반이나 절구에 놓고 메로 쳐서 차지게 하고 흰떡을 떡판에 놓은 채 굵게 비빈 다음, 도독하게 반을 지은 후 ‘옴(ॐ)’자(字) 떡살로 문양을 찍어 알맞게 썰고 참기름을 겉에 바른다.

조선 후기에는 절떡 대신 장안의 재상들이 빈대떡을 만들어 “아무개 대감의 적선(積善)이오!”하면서 기민(饑民)들에게 나눠 주는 적선떡(積善餠)을 돌렸다고 한다.-(九山스님) 증언-이러한 적선떡(積善餠)이 빈대떡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사대문안 양반들이 가난한 이들, 즉 빈자(貧者)를 위해 적선한 음식에서 유래돼 빈자떡이라 부르다가 빈대떡이 됐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조선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이 언해한 책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 보면 “‘빙저’의 중국식 발음인 ‘빙져’에서 빈대떡이 나왔다”라는 설과 빈대골이라 불리던 정동에 유난히 부침개 장수가 많아 빈대떡이라고 불리게 됐다는 얘기와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기름에 지진 고기를 올릴 때 밑에 바치는 고임음식이었다는 설 등이 등장한다.

1670년(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가 후손들을 위해 지은 조리서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빈대떡(빈자병)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녹두를 갈아 전을 부치다가 그 위에 팥과 꿀을 반죽한 소를 넣고 다시 녹두 간 것으로 덮어 만들라고 돼 있다. 이 음식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김치와 나물류가 들어간 식사용 전으로 탈바꿈됐고, 그것이 현재의 빈대떡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어쨌든 빈대떡은 서민음식이고 비록 서민음식이지만 영양만큼은 부자음식 부럽지 않은 음식이라 할 것이다.

한편 대보름날 전야 법고를 치는 스님에게 아무 동네 아무개 하고 원한이 있으니 이를 풀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풀 사람의 이름을 쓴 단자를 주면 스님은 그 집을 찾아가 “아무 동네 아무개의 풀이떡이요”하며 떡을 전달한다. 이 떡이 풀이떡 또는 해원병(解怨餠)이라고 한다.

해원병(解怨餠)은 인절미(引切米)를 말한다. 한 덩어리를 올려놓고 함께 먹는 사람끼리 잡아끌어 떼어서 먹는 것이다. 한 음식을 떼어 먹음으로써 일심동체를 다지는 우리 전래의 풍습이다.

그 옛날 인절미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신행을 왔을 때 친정어머니가 싸주었던 떡이기도 하며 신랑이나 시댁 식구들과 인절미처럼 잘 어우러져 살라는 뜻이 있는 떡이기도 하다.

인절미는 화해의 떡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새해맞이 민속으로 대보름 전후에 원풀이 떡을 해서 돌리기도 했다고 한다. 원망을 푼다고 해 ‘해원병(解怨餠)’ ‘해원떡’이라 불린 이 떡으로 지난해 불편했던 관계를 씻고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참회와 화해의 선물이다. 그 떡을 먹음으로써 한 해 동안 적체된 원한을 푸는 아름다운 해원(解怨) 풍습인 것이다. 

스님들이 이 풀이떡 단자를 전하면서 그 배달의 대가로 퍼주는 곡식이나 금전을 요즘 흔히 말하는 떡값으로 속칭(俗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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