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매년 8월이 되면 떠오르는 스포츠영웅들이 있다. 맨발로 세계를 제패한 마라토너 손기정 선생과 황영조다. 손기정 선생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나라마저 잃은 시절에 베를린올림픽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섰고, 황영조는 대한민국이 세계화의 문턱으로 들어서던 바르셀로나올림픽서 마라톤 한국을 빛냈다. 특히 두 사람이 역사 속에 ‘8월의 인물’로 기록되게 된 것은 모두 자신들의 쾌거이자 민족의 거사를 8월에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8월 29일) 조국의 광복(8월 15일)을 되찾아 치욕과 기쁨이 교차하는 달에 일본과 깊은 연관이 있어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공교롭게도 둘은 56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인 8월 9일 올림픽 마라톤에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손기정 선생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대표로 뽑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었으나 마음속에는 태극기를 품고 민족의 한을 되씹었다. 그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민족의 고통인 동시에 희망이었다. 황영조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서 ‘죽음의 언덕’으로 불리던 몬주익 언덕에서 앞서 달리던 일본의 모리시타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올림픽 대회의 피날레를 금메달로 장식했다.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은 마라톤 종목 사상 아시안인으로서는 손기정 선생에 이어 2번째 우승이었으며 손기정 선생이 일제시대 우승한 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의의를 담고 있었다.

신문, 잡지, 방송 등은 매년 8월이 오면 두 사람의 특집기사를 연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주는 데 기여를 한다. 올해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중앙일보 등 일간지와 대한체육회서 발행하는 잡지 등에서 집중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둘의 기사를 보면서 아쉽게 생각되는 대목이 있다. 두 사람과 깊은 연관이 있는 남승룡 선생과 정봉수 감독의 이야기가 크게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남승룡 선생은 베를린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해 2위 손기정을 앞섰고 올림픽 본선무대에서는 3위에 올랐다. 비록 동메달에 머물렀지만 그가 마라톤에 기여한 바는 아주 컸다. 손기정과 일진일퇴의 경기를 벌여 세계 정상권의 실력을 이끌어 냈으며, 해방이후 1947년 보스톤마라톤에서도 출전해 12위를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남승룡 선생은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후배 서윤복과 함기용 등이 1947년과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국위를 선양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금, 은, 동메달을 싹쓸이, 마라톤 한국의 위세를 떨쳤다. 한 국가가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1~3위를 모두 차지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이 기록은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마라톤대회에서 1~3위를 차지하기까지 57년간 유일한 기록으로 군림해왔다. 2001년 89세의 일기로 타계한 남승룡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순천 남승룡마라톤대회가 매년 열려 많은 후배 마라토너들이 마라톤 한국을 꿈꾸며 달리고 있다.

황영조를 키워낸 정봉수 감독도 지난 2001년 타계 이후 세인들에게 잊혀졌다. 태극마크 한번 달아보지 못한 단거리 선수출신인 정봉수 감독은 1953년 한국전쟁 때 입대, 장기하사로 근무하며 육군 원호단(상무 육상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1987년 코오롱 마라톤팀 창단 감독을 맡아 황영조, 이봉주, 김완기를 길러냈다.

1950년대 이후 마라톤의 맥이 끊어진 후 황영조, 이봉주를 발굴한 것은 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혹독한 훈련과 철저한 식이요법 등을 통해 선수들을 관리했던 정봉수 감독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마라톤 한국의 전통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올림픽서 우승을 차지하고 뒤를 이어 이봉주 등이 애틀랜타올림픽서 2위를 기록하며 1990년대 한국마라톤은 세계 강국으로 군림했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선수지도에 열중했던 정봉수 감독은 1996년 신부전증이 발병한 뒤 치료와 일을 병행하다 2001년 7월 코오롱 마라톤 숙소에서 쓰러져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8월의 인물’로 손기정과 황영조를 기억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두 사람이 빛을 발하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던 남승룡 선생과 정봉수 감독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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