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곳곳에는 해학적인 산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비슬산을 뿌리로 두고 동편에 자리한 ‘풍산(노인봉, 장군봉)’의 모습이 제일 청도와 어울려 흥을 돋운다.풍산은 풍수지리적으로는 ‘동쪽’ ‘바람’을 상징하는 이름을 지닌 산이다. 이 산을 동쪽이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산은 바로 비슬산이다. 즉 비슬산 없이는 의미가 없다 할 정도로 이름에서부터 비슬산과 밀접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모양새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사연은 이렇다.전쟁에 출격했다가 비슬산의 정기를 받아 승리를
관기와 도성의 얘기를 품고 일행은 일연스님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용천사 뒤편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비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높이에 비해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간간이 발아래로 펼쳐지는 장관을 뒤로한 채 마령재까지 오르니 대견사지(大見寺址)로 가는 길과 비슬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먼저 관기가 있던 남쪽 자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견사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며 대견사지가 있는 길을 오르니 오른편에 장관이 펼쳐진다. 참꽃 군락지였다.조화봉 정상이 있는 부근에서 대견사지로 가는 일대가 만개를 한창 준비하
그림 같은 청도는 서편에 자리한 웅장한 비슬산을 마주하며 끝이 난다. 대구와 청도의 경계에 서 있는 비슬산은 청도의 핵심이자 대표라고 할 수 있다.대구 쪽에서도 비슬산을 바라볼 수 있지만 다들 비슬산의 참맛을 보기 위해서는 “현풍면이나 청도에서 봐야 비슬산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이곳에서 보면 포근하게 청도를 감싸고 있는 비슬산의 모양이 풍수지리적으로 ‘열두 폭 치마를 입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청도군민들의 가슴에 비슬산은 남다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청도에서 태어나 조각 작가로서 활
청도의 동쪽에 우뚝 솟아 청도군의 동쪽 지경을 구분 짓는 동시에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하는 운문산(雲門山).겉으로 보기에는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으로, 가지산과 문복산으로 둘러싸인 영남의 알프스로 명산대천과 심산유곡이 어우러진 절경 중 절경이다.또 신라 때는 군사 수련장과 병참기지가 있었고 고려 무인정권 시대에는 김사미 민란의 요새였으며, 조선조에는 활빈당의 거점이기도 했던 군사요충지가 바로 이곳이다.산에 올라 첩첩이 놓인 산들을 보니 ‘요새’라는 말이 참으로 어울린다. 운문산 하면 운문사를 떠올리겠지만
물, 산 그리고 인심이 맑아 3청(淸)의 고장이라 불리는 청도는 지명이 가진 의미처럼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정신문화의 뿌리 역할을 감당해온 곳이기도 하다.맑을 청(淸)에 길 도(道)를 써서 ‘맑은 길’이라 불리는 청도의 지명에서도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던 고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이 물건이었는지, 정신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역사가 말해줄 터.김경우 풍수지리가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청도를 ‘정신문화의 시작점’이라 말한다.“청도의 상황과 이 지역이 갖고 있는 기운을 보자면 ‘청’은 아무 색깔이 없는 ‘처음, 시작’을 의미하고
◆ “청도가 좋은 걸 어찌합니까” 국내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로를 따라, 밭두렁에도, 나지막한 언덕 끝까지 울퉁불퉁 못생긴 나무들이 분홍빛 하얀빛 꽃들을 피우고 있다.경상북도 최남단 청도의 가로수에는 은행나무도 아니고 플라타너스도 아닌 과실나무가 많이 쓰인다.완연한 가을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청도의 매력에 빠져 정착하게 됐다는 배명식 목사는 “탐스럽게 익은 주홍빛 감이 지천을 물들인 청도의 모습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청도 출신 이승무 (사)한국미술협회 청도지부장은 “